석탄증산계획(1955 및 1959),「석탄개발임시조치법」(1961),「광업개발조성법」(1962) 등 증산정책에 힘입어 석탄생산은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즉 1951년 16만톤에 불과하던 석탄생산은 1960년 5백만톤, 1965년 10백만톤을 초과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산의 급격한 증대로 1차 에너지중 석탄의 비중도 크게 높아져, 1965년에는 신탄을 제치고 주종에너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후 석탄의 점유율은 하락하여 1968년에는 석유에 주종에너지원의 위치를 내어주게 된다. 이는 석유의 편리성 및 국제시장가격의 안정성 외에도 1966년 겨울 발생한 연탄파동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고 있다. 동 연탄파동을 계기로 정부는 主油從炭 정책을 시행하였다.
주유종탄 정책의 추진과 함께 무연탄 소비는 감소세를 나타내었다. 이에 따라 저탄량 증가, 석탄광의 경영난, 광부실직 등 제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정부는 석탄업계의 건의를 받아들여 1969년「석탄광업 육성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였다. 동 법의 핵심적인 사항은 보조금 제도를 명시하였다는 점이다. 즉 보조금의 용도를 지정하여 세입과 세출에 계상하여야 한다는 강제조항을 명문화하였고, 특히 세입재원의 규모를 B-C유에 대한 석유류세 세입예상액에 상당하는 금액이상으로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70년부터 석탄광에 대한 보조사업이 시행되기 시작하였고, 1973년의 석유위기 도래와 함께 보조제도가 완전히 정착되었다. 이 당시 보조사업은 주로 생산부문에 집중되었다.
정부 지원제도의 정착 및 석유위기로 인한 유류가격의 상승과 함께 무연탄 생산은 꾸준한 증가세를 나타내었다. 1969년의 10.3백만톤 생산에서 1975년에는 17.6백만톤까지 증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생산을 초과하여 연탄공장은 무연탄의 확보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은 탄질저하 문제를 초래하였고, 또한 지역적 및 계절적인 수급불균형 사태를 자주 야기하였다. 이에 정부는「석탄수급조정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1975)하였다.
「석탄수급조정에 관한 임시조치법」은 석탄 및 석탄가공제품의 수급에 중대한 차질을 초래할 우려가 인정될 때에는 상공부장관(현 지식경제부 장관)이 생산량의 조정, 지역적ㆍ계절적 판매수량의 조정, 매점ㆍ매석의 방지, 사용제한, 품질관리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연탄공장을 허가제로 연탄판매업을 등록제로 하였으며, 석탄의 품질등급 및 연탄의 품질기준을 설정하였다. 이로써 무연탄 및 연탄의 유통질서를 확립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란의 회교혁명으로 촉발되기 시작한 제2차 석유파동은 17백만톤 대에서 유지되던 무연탄 수요를 2년만인 1980년에 20백만톤 대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국내생산은 18백만톤 대에 머물러 1978년부터 해외에서 무연탄을 수입하여 수요를 충당하였다. 이 당시에는 수입무연탄 가격이 국내탄에 비해 높아 가격 차이에 대해 보전자금을 지급하였다. 이러한 수급상황을 반영하여 국내탄 생산은 꾸준히 증가, 1986년 24백만톤 대를 넘어섰으며 1988년에는 사상 최고수준인 24.3백만 톤까지 증가하였다.
연탄수요가 1986년 이후 감소하면서, 석탄광의 폐광에 따른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었다. 이에「석탄산업법」을 1988년 개정하여, 1989년부터 폐광지원 사업을 추진하였다.
폐광하는 탄광의 근로자에 대해서는 퇴직금, 임금, 실직위로금, 생활안정금, 이사 및 구직활동비, 자녀학자금, 전업훈련비 등이 지원되었으며, 광업자에게는 생산톤당 일정액의 광업시설 이전 및 폐기 지원비가 지급되었다. 또한 산림훼손복구 및 광해방지 비용도 그 시행기관에 실 소요액 기준으로 지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