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정부수립 후 귀속탄광의 운영은 정부 직할과 민간인 관리로 이분화 되어 있었다. 정부 직할 탄광으로는 삼척(장성 및 도계), 단양, 문경, 은성, 화순, 영월, 함백 등 무연탄광과 울산, 길원, 영일 등 갈탄광이 있었다. 이중 무연탄광은 1950년 석탄공사 설립과 함께 석탄공사로 이관되었다.
한편 민영탄광은 광복 당시 거의 전무한 상태였으나, 1947년부터 출원된 광구권에 대한 허가가 이루어져, 개발이 소규모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부터 신규탄광의 개발이 확대되고, 특히 1956년부터는 국유 귀속탄광의 민영화가 이루어지면서, 석탄공사 중심에서 민영탄광 중심으로 석탄산업이 전환되어 갔다. 이 당시 민영화된 탄광이 강원(태백), 경주, 문경, 마성(경북 마성) 등으로, 석탄공사가 운영하는 탄광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간에 불하되었다.
철도의 확충은 석탄수송 여건을 크게 개선하여 석탄증산 및 석탄산업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제공하였다. 1955년 영암선(영주-철암) 및 문경선, 1956년 영월선 등이 개통되었는데, 특히 영암선은 현 태백시 일원의 석탄개발을 크게 확대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석탄광의 장기적 개발체제 확립을 위해 1961년 정부는「석탄개발 임시초치법」을 제정하고, 1962년부터 인접광구를 통합하여 대단위화 한 ‘탄좌회사'를 설립하였다. 이 때 설립된 탄좌회사가 사북(동원), 정암(삼탄), 회동, 나전, 문경(대성) 등이다.
또한 1962년「광업개발 조성법」, 1969년「석탄광업 육성에 관한 임시조치법」등을 통한 조성책으로 석탄생산은 크게 증가하였으며, 1973년의 제1차 석유파동은 국내석탄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석탄생산은 1951년 16만톤 수준에서 1955년 131만톤, 1960년 535만톤, 1965년 1,025만톤, 1970년 1,239만톤, 1975년 1,759만톤 등으로 증가하였다.
특히 이란의 회교혁명으로 촉발되기 시작한 제2차 석유파동은 17백만 톤 대에서 유지되던 무연탄 수요를 2년만인 1980년에 20백만 톤 대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국내생산은 18백만 톤 대에 머물러 1978년부터 해외에서 무연탄을 수입하여 수요를 충당하였다. 이러한 수급상황을 반영하여 국내탄 생산은 1980년 18.6백만 톤에서 꾸준히 증가 1986년 24백만 톤 대를 넘어섰으며 1988년에는 사상 최고수준인 24.3백만 톤까지 증가하였다.
그러나 석탄공사의 생산은 1963년 4백만 톤 대를 넘어선 이후 3.8-5.2백만 톤 수준을 유지하였다. 반면 민영의 생산은 1955년 35만톤 수준에서 1960년 277만 톤에 달하여 국내석탄생의 50% 이상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즉 국내탄 생산증가는 민영탄광이 주도한 결과이다. 하지만 국내탄 생산증가는 탄광수의 급격한 증가를 초래하였다. 즉 탄광수는 1955년 30-40개에서 1972년 136개, 1975년 239개, 1985년 361개 등으로 크게 증가하였으며, 이는 곧 소규모 탄광의 난립을 가져왔다. 예로, 1985년의 경우 총 361개 탄광중 284개가 연산 5만톤 미만이었다.
연탄수요가 1986년 이후 감소하면서, 석탄광의 폐광에 따른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었다. 이에「석탄산업법」을 1988년 개정하여, 1989년부터 폐광지원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석탄생산 및 탄광수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즉 1987년 363개 탄광 24.3백만톤 생산에서 1990년 215개 탄광 17.2백만톤 생산, 1995년 27개 탄광 5.7백만톤 생산, 2000년 12개 탄광 4.2백만톤 생산, 2005년 8개 탄광 2.8백만톤 생산 등으로 감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