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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불(88호)
(송암박두성기념관 소장,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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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CLOVA Dubbing으로 제작한 AI보이스입니다.)

해설

촉불 88호
영결 김구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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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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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결 김구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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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해설

4682년 7월 11일, 영면(김구선생) 오호라 팔십 평생 가시밭길을 오로지 가엾은 겨레와 짓밟힌 국토를 위해 받친 김구선생은 마지막 가시고야 말았다.
어둡고 괴로운 겨레의 앞길을 민족의 태양인 양 비최이고 억누르는 원수 외격을 쳐부수기 위함을 열화같이 바라오시던 백범 김구 선생은 7월 5일로 다시 오지 못할 저 세상으로 가시었다.
오 온겨레 비보에 놀라고 몸부림쳐 통곡하나 원수 아닌 겨레의 손에 운명하신 님. 소생할 길 없고 말없이 소리 없이 나래와 순직하시었다.
서울 서대문 숙소인 경교장에서 독서하시는 중 전에 자주 만나도 보았던 유망한 청년이라고 인정하여 왔든 육군 토병 중에 안두희란 자에게 권총으로 저격을 당하여 절명된 것이다. 참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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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해설

여덟째되는 7월 5일,
선생의 국민장은 내외국민의 심심한 애도 속에 장엄하게 진행되었다.
원통함을 하소연하려고 경향에서 모여드는 조객이 4일 밤에 경교장에 그득 찼고 마지막 밤을 새우는 그들의 눈에 선생의 남긴 뜻을 뿌듯이 간직한 굿센 결의가 엿보였다.
5일 새벽부터 발인을 앞두고 부산했으며 어린 마음에 슬프기만 한 백범학원 아동의 울부짖음이 시작된다. 어제까지도 맑았던 날씨도 이날의 구슬픔을 아는 듯 검은 구름이 경교장 하늘에 무겁게 얼드린다.
정오구시에 건국 일천원 양성소 동지들이 만든 생화가 영구에 덮이고 이어 주상 내외와 유복친과 측근자들만의 간소한 영결이 끝났다.
아홉시 반, 영구는 동지들이 모시어 현관 앞에 옮겨졌다. 곡성이 일시에 낭자해진다. 눈물의 바다 오열의 바다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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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해설

바람이 불고 영정이 크게 너풀거린다. 아홉시 오십분 경 굽은 경교장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장렬 속에 놓였다.
선생이 꿈에도 잊지 못하는 태극기로 덮였다. 생화가 변두리로 놓여진다. 깨끗한 영여다. 장렬은 새문 안 예배당 앞에서 새문 밖 로터리까지 뻗쳐있다.
경찰 간부 열두명을 선두로 국기 불룩해진 군 합동 군악대, 전구의장병 각 대학의 영구차-의 종대가 있고 영구-후구의장대, 사진 전구의장대, 선생의 사진을 삼군청년회원들이 받들고 섰고, 이어 사진 후구 의장대 악대 조가대가 직렬하여 추도가가 구슬펐다.
이어 장의 위원들이 들어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지구라고 쓴 영정이 서 있다. 영구 전구 호위대가 비통한 얼굴로 서 있고 140명의 남녀군이 경건하게 영구를 모시어 메고 있다. 영구 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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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해설

호위대에 이어 주상 김신씨의 군 관진복에 애처롭고 유복친척들이 뒤를 이었다. 열시 사십오분 영구는 발인한다. 애도하는 민중의 도열 한가운데를 천천히 장렬히 나아간다. 1319 동안을 기거하시던 경교장을 떠나신다.
뼈를 깎고 살을 베이며 애끼던 이 나라, 겨레를 뒤에 두고 영영 가시는 것이다. 님은 가신다. 내키지 않는 발길 무겁게 얼을 옮기어 가신다. 친척의 뒤에는 한독당원, 성균관 유도회, 대한청년당, 헌병, 경향 대한독립 각 대표단체, 안동 김씨 단체,
각종 단체 등의 순서로 행렬이 광화문을 지나 종로를 거쳐 동대문역 영결식장인 서울운동장에 오후 두시 십분에 안착 되었다.
선생을 추모하는 수십만 조객의 엄숙한 애도 속에 역사적인 선생의 영결식이 선포되었다. 하늘과 땅이 함께 깊은 오열에 서리어 있는 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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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해설

선생을 마지막 보내려는 순간이다. 칠월 찌는 폭양이 온누리를 불덩이처럼 화끈거리게 하는 거리거리이건만 연도에 성벽처럼 운집한 시민과 더불어 장례식장을 찾아드는 조객들의 장사진은 물결처럼 밀려들 뿐이다.
이른 아침부터 모든 조객들은 오전 열시가 채 못되어 벌써 넓은 식장 안을 송두리째 덮어 싸고 있다. 흰 바탕에 검은 테두리를 한 정장과 조끼는 선생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는 글월과 아울러 그의 최후를 못내 슬퍼하는 민족의 애도문이
늠름히 아로새기어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삼스러이 비통한 심정을 자아내게한다. 본부석 이층 정면에는 태극기가 걸렸고 바로 그 밑에 영구 모실 자리가 준비되어 있고 그 좌우 편에 리대통령, 신국회의장, 김내무장관의 꽃다발이 놓여 있다. 본부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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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으로 하여 왼편으로 리총리를 위시한 정부진들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중앙 전면 뒤 행렬을 기다리는 장의위원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그 뒤로 정당 사회단체를 일반 조객들이 피로 물들인 고인의 유훈을 기어코 애도겠다는 침통한 조기를 선두로 입추의 여지가 없도록 가득히 뻗어 나갔다.
이윽고 의장병을 선두로 장중한 조가에 맞추어 영구 행렬이 당도, 검은 목관이 인정한 자리에 안치되었다. 의장병의 도포 세 발이 지축을 흔들었다.
박윤진씨의 사회로 국민의례, 국가봉창, 유해 군악대의 주악, 회장 오세창씨 대리로 조소앙씨로부터 우리는 슬픔을 억제하고 선생의 애국정신을 이어 제2의 백범선생이 생겨야 한다. 민족 중심의 대동단결로 선생이 기어코 이루려던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개회사가 있은 다음 유림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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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보고 학생연합단체의 교사장의 부위원장 조완구씨의 소향, 김규식 박사가 드리는 말씀, 이범석 총리의 제문 낭독, 이대통령의 조사 대독이 있고, 내외빈들의 조사가 있었다. 이어 비통에 흐느끼는 상주 김신씨의 소향을 끝으로 서울교향악단의 애끓는 송곡이 끝나자 영결식의 마지막을 고하는 조포 세 발이 또한 천지를 흔들었다. 이로써, 역사적인 백범 영결식은 폐회되고 행렬은 장지 효창공원으로 향하였다.
을지로를 쫓아 남대문으로 나아갔다.
만호장안에는 완전히 철시되었고, 거리의 인산인해를 이루는 폭양에도 기나긴 시간을 기다려, 노소 없이 선생의 유해를 울어 보내었다.
식장을 떠난 것이 오후 네시, 연호의 통곡을 들으면서 한걸음 남대문을 나서 갈월동, 남영동을 지나 원효로로 꺾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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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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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경찰서 앞에서 다시 북쪽으로 꺾어졌다. 이같이 해서 선생의 영구는 자갈을 새로 펴, 깨끗이 단장한 지름길을 더듬어 금양국민학교 앞을 지나 장지에 도착한 것은 오후 여섯시, 영여는 삼열사의 묘앞에서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어 고인이 생전에 얼마나 삼열사를 사랑하였든가를 다시 말해주는 듯했다.
서울운동장에서부터 따라온 군중 연도에서 기다리다가 뒤따라온 이들 아침부터 점심을 싸와 가지고 자리잡고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은 효창원 푸른 숲을 덮은 사람의 매봉오리는 순간의 통곡의 바다로 변했다.
최후로 선생을 보내는 하관식은 거행되었다.
여덟시간 눈물 또 눈물, 산천초목도 몸부림치는 듯 대중의 통곡은 그칠 줄을 몰랐다.
상주 김신 부부의 마지막의 곡과 함께 팔십 평생을 항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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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광복에 다 바치신 김구 선생의 무쇠 같은 육체는 장의위원회 간부들의 손으로 하관되어 깨끗한 황토로 덮혀 봉분 되었다. 봉분제도 끝나니 민족의 거성 백범 선생의 국민장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때는 저녁 노을도 보랏빛으로 변한 아홉시경,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는 군중의 가슴속에는 한없는 슬픔이 뼈아프게 처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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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불 88호
영결 김구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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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결 김구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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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2년 7월 11일, 영면(김구선생) 오호라 팔십 평생 가시밭길을 오로지 가엾은 겨레와 짓밟힌 국토를 위해 받친 김구선생은 마지막 가시고야 말았다.
어둡고 괴로운 겨레의 앞길을 민족의 태양인 양 비최이고 억누르는 원수 외격을 쳐부수기 위함을 열화같이 바라오시던 백범 김구 선생은 7월 5일로 다시 오지 못할 저 세상으로 가시었다.
오 온겨레 비보에 놀라고 몸부림쳐 통곡하나 원수 아닌 겨레의 손에 운명하신 님. 소생할 길 없고 말없이 소리 없이 나래와 순직하시었다.
서울 서대문 숙소인 경교장에서 독서하시는 중 전에 자주 만나도 보았던 유망한 청년이라고 인정하여 왔든 육군 토병 중에 안두희란 자에게 권총으로 저격을 당하여 절명된 것이다. 참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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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째되는 7월 5일,
선생의 국민장은 내외국민의 심심한 애도 속에 장엄하게 진행되었다.
원통함을 하소연하려고 경향에서 모여드는 조객이 4일 밤에 경교장에 그득 찼고 마지막 밤을 새우는 그들의 눈에 선생의 남긴 뜻을 뿌듯이 간직한 굿센 결의가 엿보였다.
5일 새벽부터 발인을 앞두고 부산했으며 어린 마음에 슬프기만 한 백범학원 아동의 울부짖음이 시작된다. 어제까지도 맑았던 날씨도 이날의 구슬픔을 아는 듯 검은 구름이 경교장 하늘에 무겁게 얼드린다.
정오구시에 건국 일천원 양성소 동지들이 만든 생화가 영구에 덮이고 이어 주상 내외와 유복친과 측근자들만의 간소한 영결이 끝났다.
아홉시 반, 영구는 동지들이 모시어 현관 앞에 옮겨졌다. 곡성이 일시에 낭자해진다. 눈물의 바다 오열의 바다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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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고 영정이 크게 너풀거린다. 아홉시 오십분 경 굽은 경교장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장렬 속에 놓였다.
선생이 꿈에도 잊지 못하는 태극기로 덮였다. 생화가 변두리로 놓여진다. 깨끗한 영여다. 장렬은 새문 안 예배당 앞에서 새문 밖 로터리까지 뻗쳐있다.
경찰 간부 열두명을 선두로 국기 불룩해진 군 합동 군악대, 전구의장병 각 대학의 영구차-의 종대가 있고 영구-후구의장대, 사진 전구의장대, 선생의 사진을 삼군청년회원들이 받들고 섰고, 이어 사진 후구 의장대 악대 조가대가 직렬하여 추도가가 구슬펐다.
이어 장의 위원들이 들어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지구라고 쓴 영정이 서 있다. 영구 전구 호위대가 비통한 얼굴로 서 있고 140명의 남녀군이 경건하게 영구를 모시어 메고 있다. 영구 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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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대에 이어 주상 김신씨의 군 관진복에 애처롭고 유복친척들이 뒤를 이었다. 열시 사십오분 영구는 발인한다. 애도하는 민중의 도열 한가운데를 천천히 장렬히 나아간다. 1319 동안을 기거하시던 경교장을 떠나신다.
뼈를 깎고 살을 베이며 애끼던 이 나라, 겨레를 뒤에 두고 영영 가시는 것이다. 님은 가신다. 내키지 않는 발길 무겁게 얼을 옮기어 가신다. 친척의 뒤에는 한독당원, 성균관 유도회, 대한청년당, 헌병, 경향 대한독립 각 대표단체, 안동 김씨 단체,
각종 단체 등의 순서로 행렬이 광화문을 지나 종로를 거쳐 동대문역 영결식장인 서울운동장에 오후 두시 십분에 안착 되었다.
선생을 추모하는 수십만 조객의 엄숙한 애도 속에 역사적인 선생의 영결식이 선포되었다. 하늘과 땅이 함께 깊은 오열에 서리어 있는 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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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을 마지막 보내려는 순간이다. 칠월 찌는 폭양이 온누리를 불덩이처럼 화끈거리게 하는 거리거리이건만 연도에 성벽처럼 운집한 시민과 더불어 장례식장을 찾아드는 조객들의 장사진은 물결처럼 밀려들 뿐이다.
이른 아침부터 모든 조객들은 오전 열시가 채 못되어 벌써 넓은 식장 안을 송두리째 덮어 싸고 있다. 흰 바탕에 검은 테두리를 한 정장과 조끼는 선생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는 글월과 아울러 그의 최후를 못내 슬퍼하는 민족의 애도문이
늠름히 아로새기어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삼스러이 비통한 심정을 자아내게한다. 본부석 이층 정면에는 태극기가 걸렸고 바로 그 밑에 영구 모실 자리가 준비되어 있고 그 좌우 편에 리대통령, 신국회의장, 김내무장관의 꽃다발이 놓여 있다. 본부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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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으로 하여 왼편으로 리총리를 위시한 정부진들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중앙 전면 뒤 행렬을 기다리는 장의위원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그 뒤로 정당 사회단체를 일반 조객들이 피로 물들인 고인의 유훈을 기어코 애도겠다는 침통한 조기를 선두로 입추의 여지가 없도록 가득히 뻗어 나갔다.
이윽고 의장병을 선두로 장중한 조가에 맞추어 영구 행렬이 당도, 검은 목관이 인정한 자리에 안치되었다. 의장병의 도포 세 발이 지축을 흔들었다.
박윤진씨의 사회로 국민의례, 국가봉창, 유해 군악대의 주악, 회장 오세창씨 대리로 조소앙씨로부터 우리는 슬픔을 억제하고 선생의 애국정신을 이어 제2의 백범선생이 생겨야 한다. 민족 중심의 대동단결로 선생이 기어코 이루려던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개회사가 있은 다음 유림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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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보고 학생연합단체의 교사장의 부위원장 조완구씨의 소향, 김규식 박사가 드리는 말씀, 이범석 총리의 제문 낭독, 이대통령의 조사 대독이 있고, 내외빈들의 조사가 있었다. 이어 비통에 흐느끼는 상주 김신씨의 소향을 끝으로 서울교향악단의 애끓는 송곡이 끝나자 영결식의 마지막을 고하는 조포 세 발이 또한 천지를 흔들었다. 이로써, 역사적인 백범 영결식은 폐회되고 행렬은 장지 효창공원으로 향하였다.
을지로를 쫓아 남대문으로 나아갔다.
만호장안에는 완전히 철시되었고, 거리의 인산인해를 이루는 폭양에도 기나긴 시간을 기다려, 노소 없이 선생의 유해를 울어 보내었다.
식장을 떠난 것이 오후 네시, 연호의 통곡을 들으면서 한걸음 남대문을 나서 갈월동, 남영동을 지나 원효로로 꺾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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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용산 경찰서 앞에서 다시 북쪽으로 꺾어졌다. 이같이 해서 선생의 영구는 자갈을 새로 펴, 깨끗이 단장한 지름길을 더듬어 금양국민학교 앞을 지나 장지에 도착한 것은 오후 여섯시, 영여는 삼열사의 묘앞에서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어 고인이 생전에 얼마나 삼열사를 사랑하였든가를 다시 말해주는 듯했다.
서울운동장에서부터 따라온 군중 연도에서 기다리다가 뒤따라온 이들 아침부터 점심을 싸와 가지고 자리잡고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은 효창원 푸른 숲을 덮은 사람의 매봉오리는 순간의 통곡의 바다로 변했다.
최후로 선생을 보내는 하관식은 거행되었다.
여덟시간 눈물 또 눈물, 산천초목도 몸부림치는 듯 대중의 통곡은 그칠 줄을 몰랐다.
상주 김신 부부의 마지막의 곡과 함께 팔십 평생을 항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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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조국광복에 다 바치신 김구 선생의 무쇠 같은 육체는 장의위원회 간부들의 손으로 하관되어 깨끗한 황토로 덮혀 봉분 되었다. 봉분제도 끝나니 민족의 거성 백범 선생의 국민장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때는 저녁 노을도 보랏빛으로 변한 아홉시경,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는 군중의 가슴속에는 한없는 슬픔이 뼈아프게 처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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