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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재일학도의용군은 1954년 9월 국립정양원에서 수용보호를 받고 있던 중에 임의단체인 재일학도의용대를 조직하여 회원의 권익보호와 친목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렇지만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인하여 단체가 해산되었는데, 정부의 취업 알선으로 생활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965년 9월 25일에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정관을 제정하였다. 이후 1967년 12월 31일에 「국가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특별원호법」이 개정됨에 따라 재일학도의용군에 대하여도 부분적인 원호가 시작되었고, 1985년 1월 1일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됨으로써 재일학도의용군이 명실상부한 국가유공자로, 그 유족이 국가유공자의 유족으로 예우를 받게 되었다. 마침내 1989년 1월 1일 「국가유공자 등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 개정과 함께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공법단체로서 이 법의 적용단체가 되었다.
배경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거주 애국청년학도 641명이 병역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구해야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현해탄을 건너 1950년 9월 15일부터 같은 해 11월 14일까지 5차례에 걸쳐 전선에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자진하여 참전하였는데,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원산상륙작전, 백마고지전투 등 수많은 격전지에서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재일학도의용군은 61명이 전사하고 83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희생을 겪었다. 그렇지만, 1952년 4월 미국과 일본 간에 평화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주권을 회복한 일본정부가 재일학도의용군의 일본 재입국을 거절하여 242명이 부득이 한국에 잔류하여 국립정양원에서 수용보호를 받아야 했다. 이후 1954년에 임의단체 재일학도의용대를 조직하였다가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사회단체해산령에 의하여 해산되었으며, 1965년에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며 호국전선에 자진 참여한 숭고한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내외 국민의 호국정신을 함양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내용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정관」 제5조에 따라 ① 회원의 복지증진을 위한 사업, ② 내외국민의 애국정신 함양을 위한 사업, ③ 기타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사업 등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재일학도의용군의 6.25참전 의의 선양 및 국민의 애국정신 함양을 위하여 재일학도의용군 전몰용사 위령비 건립,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 건립 등 6.25참전 관련 기념물 설치활동을 국내외적으로 적극 추진하고 있다.  

조직으로는 본회를 비롯하여 부산, 인천, 일본 동경에 각각 지부를 설치하고 있다.
참고자료
- 국가보훈처, 《보훈 50년사 1961~2011》, 2011, pp. 734-737.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9044)
집필자
오일환(천안함재단 이사)
최초 주제 집필
2017. 12. 26
최초 주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