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문제를 바라보는 미국과 북한의 시각 차이는 핵무기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 폐기(CVID)’, 미사일 폐기 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과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적대정책 철회, 북한에 대한 안전 보장(불가침조약) 등을 미국이 수용해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북한과 미국은 2003년 4월 중국의 중재로 열린 베이징 3자회담에서 이 같은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함으로써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서로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상황에서 주변국들 간에 국면 전환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한국과 미국, 일 본 간에도 한·미 정상회담, 미·일 정상회담, 한·미·일 정책조정감독그룹(TCOG)회의 등을 개최하여 상호 입장을 조율하였다. 중국도 1996년 4자회담 당시 소극적이었던 태도와는 달리, 북한 핵문제에 대한 국제적 논의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제1차 6자회담은 2003년 8월에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 북한은 1차 회담에서 농축 우라늄 핵개발 계획에 대해 부정하면서, 4단계 로드맵 제시를 통해 북한과 미국이 동시행동에 나설 것을 제안하였다. 미국의 중유공급 재개 및 북한의 핵개발 포기 의사 천명, 미·북 불가침조약 체결 → 핵사찰 수용, 미·북, 일·북 수교 → 미사일 문제 해결, 경수로 완공 → 핵 폐기의 단계가 그것이다. 미국은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대북 경제지원과 식량지원 등 과감한 접근법을 취할 수 있다고 대응하였다. 결국 1차 6자회담은 별다른 성과 없이 막을 내렸으나, 의장국 성명을 통해 6자회담이 지속될 것이라는 가능성은 남겨놓았다.
제2차 6자회담은 2004년 2월 25일 베이징에서 열렸다. 북한의 ‘동결 대 보상’ 및 ‘일괄타결·동시행동’ 조치와 ‘선(先) 핵 포기’를 주장하는 미국 사이에 팽팽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2004년 6월 21일부터 6일간 열린 제3차 6자회담은 미국과 북한이 구체적인 협상안을 제시하고 실질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한 첫 번째 회담이었다. 3차 회담에서 미국은 그동안 북한이 요구해온 에너지 제공, 대북 불가침 보장, 테러지원국 해제, 국교정상화 등에 대한 미국측 입장을 제시했다. 북한은 미국의 제안에 대응해 구체적인 핵 동결 대상과 시점 등을 명시한 안을 제시했다.
제4차 6자회담은 사전에 미·북 간 6자회담 수석대표 협의를 거쳐 3차 회담 이후 1년 여가 지난 2005년 7월 26일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 4차 회담은 각국의 내부협의를 거쳐 9월 13일부터 19일까지 2단계 회의로 이어졌다. 2단계 회의에서 북한 핵문제 해결에 관한 6자회담 최초의 합의로서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9·19 공동성명’ 이행은 합의 직후부터 경수로 제공시기에 대한 해석 차이와 미국이 마카오 소재 ‘방코델타아시아’(BDA)를 북한의 불법자금 세탁 우려대상으로 지정한 조치 등으로 난관에 부딪쳤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9·19 공동성명’의 초기단계 이행조치를 협의하기 위한 제5차 6자회담이 11월 9일 베이징에서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했다.
6자회담이 장기간 재개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한은 2006년 7월 5일 대포동 미사일 1기를 포함한 미사일 실험 발사 및 10월 9일에는 핵실험을 감행하였고, 유엔은 10월 14일 안보리 결의 1718 호를 통해 북한의 행위를 규탄하고 강력한 제재조치를 취했다. 이후 2006년 12월 18일 열린 제5차 회담 2단계 회의에서는 구체적 진전은 없었지만 참가국들이 6자회담의 유용성을 확인하였다.
2007년 2월 8일부터 제5차 6자회담 3단계 회의가 개최되어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2·13 합의)’가 타결되었다. 그러나 ‘2·13 합의’ 이행은 BDA의 북한 동결자금 문제 해결이 지연되고 이를 이유로 북한이 폐쇄·봉인 조치를 미룸에 따라 6개월 간 지체되었다. 이후 BDA 문제가 해결되면서 대북 중유 5만 톤 제공이 시작되고, 북한도 이에 맞춰 5개 핵 시설(5MWe원자로, 50MWe원자로, 200MWe 원자로, 핵재처리 시설, 핵연료공장)에 대한 폐쇄·봉인 조치를 개시하였다. 6자회담의 5개 실무그룹을 중심으로 의견조율이 이루어지면서, 2007년 10월 3일 제6차 6자회담 2단계 회의에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2단계 조치(10·3 합의)’가 채택되었다.
북한은 ‘10·3 합의’에 명시한 시한인 2007년 12월을 훨씬 넘겨 핵 프로그램 신고서를 2008년 6월 26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제출하였으며, 6월 27일 영변 5MWe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하였다. 이에 미국은 6월 26일 북한에 대한 적성국 교역법 적용을 종료하고, 테러지원국 해제 절차에 착수하였으며, 10월 11일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였다.
2008년 12월 열린 6자 수석대표회의에서는 검증의정서 채택 문제, 비핵화 2단계 마무리를 위한 불능화 및 경제·에너지 제공 이행문제, 동북아 평화·안보 지도원칙(안) 등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핵심쟁점이었던 검증의정서는 채택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09년 1월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였다. 북한은 2009년 4월 5일 국제사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로켓을 발사했다. 이에 대해 유엔 안보리가 의장성명을 통해 북한의 행위를 규탄하자 북한은 5월 25일 제2차 지하 핵실험을 강행하였다. 북한의 핵실험과 관련하여 유엔 안보리가 6월 12일 대북결의안 1874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자 북한은 6월 13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농축 우라늄 개발을 공식 선언하는 한편, 7월 24일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신선호 대사를 통해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북한이 관련국들이 요구하는 비핵화 의지표명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보이기는커녕 핵실험 강행, 우리 측에 대한 무력도발 행위지속 등으로 6자회담 재개는 계속 미뤄지는 상태에 있다.
김정은의 집권 이후에도 “김정은 정권은 핵 개발 프로그램 포기를 전제로 하는 6자회담은 하지 않겠다는 일관된 행보로 나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6자회담은 2008년 12월 이후 장기 공전 상태를 빚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