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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김동일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원인
김동일(金東一, Kim Dong Il) 1908.3.9~1998.7.20

김동일은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과학기술 두뇌들을 양성한 선각적 교육자였으며,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설립에 참여하고 우리나라 과학기술 진흥 체제 구축과 학회 발전에 힘썼다. 그는 대한화학회 설립에 참가한 후 학회 운영을 정상궤도로 진입시키고 우리나라 화학계의 국제화를 앞당긴 화학 관련 분야의 거목이며 일제 강점기 때부터 평생을 섬유, 요업, 에너지, 원자력분야에서 이용후생의 실학 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한 선구자적 엔지니어이며 학자였다. 김동일은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2005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내용

가. 기본사항
김동일은 1908년 평안남도 강서군 성암면에서 태어났으며,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사가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를 1933년 졸업했다. 이후 귀국하여 경성방직(주)의 영등포공장장이 되어 경성방직의 생산성을 일본계 방직회사보다 향상시켰다. 194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초대학장이 되었으며, 1959년까지 서울대 교수를 역임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 한편, 대한화학회 회장, 초대 원자력 위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등을 맡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과학기술 진흥 체계 구축에 힘썼다. 섬유전문가이며 요업전문가였던 그는 1960년대 한국화학섬유공업의 선구적 개척자 역할을 하였고, 1947년에는 대한 요업총협회 회장, 1957년에는 대한요업학회 초대 회장을 맡으며 18년간 우리나라의 요업 발전을 위해 봉사하였다. 1966년 제1회 대한민국과학기술상을 비롯하여 국민훈장 모란장, 무궁화장 등 다수의 수상실적이 있다.


나. 공적사항 1: 과학기술 두뇌들을 양성한 선각적 교육자
김동일은 해방 이후 11년 동안의 산업계 생활을 마감하고경성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194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발족하자 38세의 젊은 나이로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어지러운 사회환경 속에서 그는 학원이 정치투쟁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으로 휴강을 하지 않고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1952년에는 서울공대 학장으로 재 취임하여 전쟁 중일수록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도처에 흩어진 교수와 학생을 모아 부산 동대신동에 학교를 재건했으며,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전쟁 중의 사상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학내 문제를 화합과 포용정신으로 수습하고 1954년에 평교수로 돌아가서 학문 연구에 열중했다. 김동일은 해방과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거의 맨몸으로 우리나라 과학기술 두뇌들의 산실을 만든 선각적 교육자였다.


다. 공적사항 2: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한 평생
김동일은 과학기술 진흥의 중요성을 정부나 산업계에 일깨워주며 각종 과학기술 분야 학회의 구심점 역할을 할 단체가 필요하다는 판단아래 1966년 5월 19일 제1회 과학기술자대회에서 그 때까지 흩어져서 활동하던 과학기술단체들이 발전적 해산을 하고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창립을 발의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후 과총 창립 준비 위원으로 실무를 주도하며 90개 과학기술관련 단체를 하나로 집결시켜 1966년 9월 24일 과총 창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여 초대 부회장에 추대되었고, 상임 고문직을 평생 동안 맡으면서 “한국과학기술회관” 건축, “과학기술인의 신조” 제정 등을 맡아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한평생을 봉사했다.


라. 공적사항 3: 우리나라 화학계의 발전 기반을 조성한 거목
김동일은 1946년에 이태규,안동혁, 조광하, 전풍진, 이승기 등 10여명과 더불어 창립발기인으로 조선화학회를 세웠고 재무간사를 맡았다. 1951년에는 대한화학회 4대 회장이 되어 초창기 한국 화학계의 발전에 눈부신 활약을 하였고, 5대, 8대, 12대, 13대에 걸쳐 여섯 번이나 회장을 역임했으며 1975년에는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60년 제8대 대한화학회 회장에 취임한 그는 학회 운영 활성화를 위해 간사장 제도를 도입했고 이후 1961년에 경남·부산지부, 1962년에는 충남지부, 전남지부가 결성되며 학회는 크게 성장하였다. 그는 1956년 국제순수화학및응용화학연합회(IUPAC) 총회에 대한화학회 대표로 참석한 이래로 냉전 체제 속에서 소련의 반대를 무마해가며 IUPAC 입회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여 마침내 1963년 런던에서 제 22차 IUPAC 총회에서 입회 승인을 얻어내어 한국 화학계의 국제화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1966년부터는 화학회관 건립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활동하여 1971년 마침내 화학회관 건립을 이루어 냈다.

참고자료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http://www.kast.or.kr/hall/)

김동일, <<나의 걸어온 길: 九旬을 맞이하여>> 보진재, 1998.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총 이십년사>>, 1987.

집필자
문만용(전북대학교 연구교수, 과학사)
최초 주제 집필
2008. 08. 28
최초 주제 수정
2008. 0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