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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안동혁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원인

안동혁(安東赫, Ahn Tong Hyuk) 1907.9.14.(음력)~2004.10.14

안동혁은 식민지시기에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수와 중앙시험소 화학부장을 역임하는 등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되던 식민지시기에 고급 산업기술자로 활동하며 유지(油脂) 연구와 공업용수 조사에서 많은 성과를 냈다. 해방 후에는 중앙공업연구소 소장으로서 과학기술 기관 및 단체를 조직하는 등 산업기술의 재건과 발전을 위해 크게 힘썼다. 특히, 1950년대 상공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자금, 에너지, 비료로 대표되는 3F 산업정책을 추진해 한국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과학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우리나라 산업기술과 공업의 기초를 다진 화학공학자이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2003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이 설치될 때 첫 번째 헌정자 14명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내용

가. 기본정보
안동혁은 1907년 경기도 고양군에서 태어났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응용화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9년 큐슈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를 졸업했으며, 경성고등공업학교 조교수, 중앙시험소 화학공업부장을 역임하는 한편 1934년 과학지식보급회 이사로 과학대중화 운동에 참여했다. 해방이 되자 중앙시험소와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접수하여 관리했으며, 두 기관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재건을 주도했다. 1946년 중앙시험소의 후신인 중앙공업연구소의 소장이 되었으며, 조선화학기술협회, 조선요업기술협회 등 각종 기술협회를 조직하여 산업 재건에 기여했다. 1948년 조선화학회와 조선화학기술협회를 통합하여 대한화학회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 학회의 초대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51년 3대 회장이 되었다. 1953년 10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58년부터 1976년까지 한양공과대학 교수를 지냈다.


나. 주요공적 1: 유지 및 공업용수에 대한 연구와 조사
식민지 시기 안동혁은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수와 중앙시험소 화학부장을 역임하는 등 식민지 시기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고급 기술직에 종사하였다. 그는 이 두 기관에 근무하며 유지 연구, 전국적인 수자원 조사, 기타 공업에 대한 기술적 지원 등을 수행하였다. 안동혁은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 유지학을 가르치면서, 중앙시험소를 중심으로 유지 분야의 연구를 진행하여 비누제조법 등의 특허를 출원하였고, 유지의 성질에 대한 여러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가 이룩한 중요한 성과로 꼽히는 공업용수조사 사업은 1937년에서 44년까지 전국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는 영등포, 부산, 군산, 이리, 해주, 사리원 등 전국을 직접 답사·조사하여 수질, 수량, 지질 상태 등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이는 해방 이후 중앙공업연구소(중앙시험소의 후신)에서 재간행되어 우리나라 공업 발전을 위한 중요한 기초 정보가 되었다.


다. 주요공적 2: 해방 직후 과학기술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기여함
안동혁은 해방직후인 1945년 8월 경성고등공업학교 출신 한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조선학술원 기술부, 조선공업기술연맹의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전문기술자의 공백을 메울 한국인 전문가들을 조직하였다. 특히 그는 조선공업기술연맹 산하에 화학, 요업, 식품 기술협회를 조직하여 그 회장을 맡았다. 이 단체들은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 국내 산업이 그나마 원활히 가동될 수 있도록 기여하여, 산업 재건에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안동혁은 해방 직후 중앙시험소와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일본인들로부터 접수하여, 이들 기관의 재편에 힘을 기울였다. 경성공업전문학교의 경우 1946년 9월 국립 서울대학교로 편입되기 전까지, 경성공업대학으로 개칭하고 조선, 항공, 전기통신과를 신설하는 등 최고의 공과대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앙시험소를 접수한 안동혁은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인력 공백 상태에서 각 부서에 한국인 기술자들을 물색하여 보충하는 한편, 기존의 연구부서 이외에 식품공업과와 기계공작과를 신설하여 신생 독립 국가의 기술적 수요에 대비하려 하였다. 그가 1953년까지 소장으로 있었던 중앙시험소-중앙공업연구소는 당시 국내 유일의 과학기술 관련 기관으로서 당시 과학기술계의 총본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라. 주요공적 3: 상공부 장관으로서 한국 현대 산업의 토대를 닦음
1953년 10월 상공부 장관으로 발탁된 안동혁은 피폐해진 한국 산업의 건설을 위해서는 3F, 즉 자금(Fund), 에너지와 연료(Force & Fuel), 비료(Fertilizer)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우선순위로 하는 이른바 "3F 상공정책"을 추진하였다.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자금 및 산업을 가동시키기 위한 에너지 자원이 필요하며, 당시 빈곤의 퇴치를 위해서는 농업에 사용될 화학 비료의 자급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우선 산업 시설을 건설하기 위한 자금은 UNKRA, ECA 등 당시 UN과 미국 등에서 제공되어 주로 소비재의 도입에만 사용되던 원조 자금을 이용하였다. 또 부족한 발전 용량을 보충하기 위해 미국의 원조 자금으로 서울의 당인리 제3호기, 마산화력, 삼척 제1호기 등 3개 화력 발전소(총 10만 KW 용량)의 건설을 추진하였으며, 이는 1956년 완공되었다. 그리고 안동혁은 장관 재임기간 중 충주비료(1961년 준공), 인천판유리(1957년 현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 문경시멘트 등 주요 산업 시설의 건설을 계획하고 시작하였다. 그의 3F 정책에 의해 추진된 전력 확보 및 비료, 판유리, 시멘트, 철강 등 주요 기간산업의 건설은 이후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경제개발의 토대가 되었다.

참고자료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http://www.kast.or.kr/hall/)

동혁, <<殘像: 안동혁선생고희기념문집>>, 한양대학교 산업과학연구소, 1978.

안동혁, <<繼像: 안동동혁선생팔순기념문집>>, 보진재, 1986.

대한화학회 편, <<우리화학계의 선구자: 1안동혁 선생>>, 자유아카데미, 2003.

집필자
문만용 (전북대학교 연구교수, 과학사)
최초 주제 집필
2008. 09. 23
최초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