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

분야별 검색

  • Home
  • 기록물 열람
  • 통합검색
  • 분야별 검색

산업/중소기업

대기업간 발전설비 경쟁과 조정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배경
1970년대 발전설비제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비유되고 있었다. 이에 발전설비 부분의 대기업간 경쟁은 재계의 ‘영토분할전쟁 첫 장’이면서 가장 치열한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1970년대 후반 발전설비업 관련업체수가 14개에 이르러 내수대비 생산능력 과잉이 가장 우려되는 부문 중의 하나로 바뀌었고 결국 정부의 중화학공업조정 우선대상으로 정해졌다.
내용

대기업간 발전설비 부문의 일차 경쟁은 1976년 수주경쟁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전력」이 「울산화력」 4, 5, 6호기와 「아산화전(牙山火電)」(30만 KW, 2기) 1, 2호기의 건설계획을 밝혔을 때 1기당 1천억 원(화력)에서 5천억 원(원자력)에 달하는 사업규모에다 정부가 향후 20년간 100억 달러를 발전소 건설 부문에 투입하겠다고 밝혔으므로 처음부터 대기업간 직, 간접 경쟁은 치열했다. 결국 「아산화전(牙山火電)」의 1, 2호기는 「현대건설」이 미국의 「웨스팅 하우스」와 합작하여 받아 내었고 「대우」는 스위스의 「브라운 보래리」사와 합작하여 울산화전(蔚山火電)의 4, 5, 6호기를 차지하였다. 여기에 불만을 가진 곳은 「현대양행(現代洋行)」이었다. 당시 「현대양행」은 IBRD로부터 8천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창원에 대단히 종합기계공장을 짓고 있는 중이었는데 정부는 IBRD의 차관도입시 안정적인 수익성을 보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삼성」, 「현대」, 「대우」, 「효성」, 「대한중기(大韓重機)」 등이 시장조사와 함께 진입을 시도하는 등 발전설비부문 시장에서의 대기업간 경쟁은 「현대양행」으로의 안정적 독주를 묵인하지 않았다. 특히 「삼성」은 일본에서 기술협력을 받아 「삼천포화력(三千浦火力)」을 건설하고자 구체적인 건설 구매의향서까지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현대양행」은 「대우」와 「현대」에 수주를 빼앗긴 데 이어 또 다시 뺏길 수 없다는 각오를 피력했고 정부에게 「현대양행」이 창원에 발전설비 공장을 만들면 수익성을 보장한다는 정부-IBRD와의 협약을 들고 나왔다. 이때부터 「현대양행」과 「삼성중공업」의 싸움은 심각하게 발전되어 나갔다.


정부는 1원화를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양행」과 「삼성중공업」의 대립은 심각했고 1977년 5월 21일 경제장관협의회는 장시간의 격론 끝에 「삼성중공업」으로 기울어 있던 「삼천포화전」을 「현대양행」으로 넘기는 원칙론으로 돌아갔다. 정부는 발전설비 제작은 「현대양행」으로 일원화하고 「삼성중공업」에게는 산업용 보일러 전문업체로 지정해 주었다.


그러나 대기업집단들의 이의제기는 계속되었다. 원자력 5, 6호기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현대중공업」과 「대우중공업」이 외국기업을 등에 업고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결국 1978년 4월 18일과 22일 열린 경제장관협의회 결의로 「현대중공업」, 「대우중공업」이 참여하게 되어 발전설비기업은 1원화가 폐지되고 3원화되었다(4. 22 조치). 그러나 여기에서 배제된 「삼성중공업」과 「효성중공업」이 강력히 이의를 제기했다. 결국 정부는 다시 10월에 「삼성중공업」까지 진입을 허용하여 발전설비업은 4원화가 되었다. 「현대중공업」은 9월 「서해화력」과 「삼천포화력」에 들어갈 기자재를 울산으로 옮겨 더욱 경쟁체제를 다듬었다. 과잉은 시작되었다.


1979년중화학공업 1차 조정 5.25 조치로 발전설비는 다시 2원화되었다. 「현대」-「현대양행」을 제1그룹으로 통합하여 「현대양행」 창원공장의 경영권이 「현대중공업」에 넘어갔고 「삼성」-「대우」가 통합하여 제2그룹으로 되었다. 여기에서 「현대」, 「대우」의 418억 원 투자축소도 결정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 8월 19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회의와 20일 발표로 발전설비는 「대우」로 1원화가 되어 발전설비는 5년 만에 원점으로 돌아왔다. 9월 13일 「현대양행」은 정부의 「선인수 후정산」 원칙에 따라 임시주총을 열고 경영권을 「대우」에 넘겼다. 「현대중공업」은 당연히 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단일화된 「한국중공업」에 인력도 넘겨주려고 하지 않다가 결국 자동차를 택하고 발전설비를 넘겨주는 선택으로 매듭지었다.


「대우」의 발전설비 인수는 비록 2개월 만에 취소되었지만 「대우」의 재계전쟁 승리와 「대우」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역사적의의
1976년부터 1980년까지 발전설비 부문에서의 과잉진입과 정부의 조정과정은 중요한 교훈을 역사적으로 남겨 주었다. 그것은 ‘정부내에서 통일되지 못하고 또 시기적으로 일관되지 못한 정부의 정책이 계속될 경우 기업들은 정부내 힘의 대립(power game)을 지켜보며 불확실한 정책시그널 속에서 합리적인 투자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되고 또 정부에 대해 비합리적 요구를 지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분명하고 일관되지 못한 정책 과 그 결과는 결국 후에 한국거시경제의 큰 비용요인으로 나타났다. 대기업간 발전설비 경쟁과 조정을 통한 역사적 경험은 산업정책에서 정부의 분명하고 일관성 있으며 장기적인 정책 제시와 정책투명성이 매우 중요함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참고자료

김광모,《한국의 산업발전과 중화학공업화 정책》지구문화사, 1988.

김의균, <현대 대 대우> 《신동아》, 1980. 11, pp. 122-133.

김의균, <중화학공업투자조정의 내막> 《신동아》, 1980. 12, pp. 256-263.

박병윤, <중화학공업과 재계판도> 《기업경영》245, 1978. 9, pp. 32-37.

박병윤, <중화학공업계의 내막> 《신동아》189, 1980. 5. pp. 194-211.

박영구, <정책시그널로 본 70년대 중화학공업조정의 미시적 연구> 《무역경영논집》제10집 부산외국어대학교 무역경영연구소, 1994. 12, pp. 5-28.

박우희,《비교우위에 입각한 중화학공업의 투자우선순위에 관한 연구》한국경제연구총서 110,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연구센터, 1979.

이갑섭, <중화학공업과 대기업> 《입법회의보》창간호, 대한민국국회, 1980. 12, pp. 25-30.

집필자
박영구(부산외국어대학교 상경대학 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7.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