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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군수공장의 창설

주제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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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배경

국군의 군수공장은정부수립 직후부터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육군 병기공창은 1949년에 접어들어 육군 병기감실의 예산을 전용하여 독립예산체제를 갖추면서부터 출발하였다. 국방부는 나아가 병기의 자주생산을 위하여 1948년 12월 15일 최초로 육군 병기공창을 창설하였고, 귀속기업체인 유항상공주식회사 용산공장과 조선유지주식회사 인천공장을 인수하여 이를 모체로 용산공장을 제1공장으로, 인천공장을 제2공장으로 각각 운영하기 시작함으로써 군수공장을 본격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공장의 규모는 수류탄과 일본식 소총 부분품의 제작 및 정비를 하는데 수준에 그쳤으며, 그중에서도 제2공장은 시설의 80%가 파괴되어 약 3개월간의 보수정비를 하고도 제품생산을 하지 못하였다. 1949년부터 병기공창은 영등포의 삼화정공주식회사를 접수하여 제3공장을 증설하고, 인천소재의 조선알미늄공업주식회사와 인천기호산업주식회사를 생산 감독공장으로 지정운영하면서 비로소 생산기술의 습득을 도모하는 한편, 처음으로 99식 소총의 탄피와 탄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내용

국방부는 육군 병기공창을 국방부직할로 흡수하여 1949년 12월 15일에 병기행정본부를 창설하고 시설확충과 기술향상에 주력하던 중, 1950년 6월 15일에 부산에 제1조병창을 창설하고 인천 제2공장을 제2조병창으로 개편하였으며, 병기와 탄약의 학리적 연구와 시험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과학기술연구소를 창설하였다. 이로써 걸음마 단계이나마 군수공장이 첫 출발할 수 있었다.


그 후 6·25전쟁의 발발로 부산을 제외한 모든 생산시설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 파괴됨에 따라 부산의 시설만을 이용하여 수류탄의 생산과 노획병기의 장비 등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전세의 역전으로 9·28수복이 이루어지자, 이 군수관련 기구들은 일시 서울로 이동하였으나 전세가 악화되어 다시 철수하게 되자, 제2조병창은 제주도로, 본부와 과학기술연구소는 부산으로 각각 이동하여 병기를 생산하였다. 


각 조병창은 1951년에 접어들면서 일본으로부터 수류탄 자재, 뇌관 도입선을 수입하여 타격식의 수류탄을 다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이와 더불어 99식 소총탄환과 대한식 소총 그리고 대인마 지뢰와 30Kg 폭탄도 제조하기 시작함으로써 보다 발전하게 되었다. 


국방부는 1952년 병기행정본부를 관리국으로 개편하고 제1조병창을 총포공장으로, 제2조병창을 탄약 및 화약 공장으로 운영하였으며, 이해 10월 1일에 제1·2조병창 및 과학기술연구소는 국방부 조병창 및 국방부 과학기술연구소로 각각 발족하게 되었다.


한편 이해 5월 31일부 조병중견기술자의 육성을 목적으로 한 기술원양성소를 설치하게 되어 제1기생 34명을 선발하여 소정의 교육을 이수하게 한 다음 12월 27일에 제1기생 27명을 배출하였으며, 이어 제2기생 33명을 선발하여 입소시켜 교육을 실시하던 중 교육과정의 개편으로 종래의 교육기간 6개월을 1년으로 연장 실시하게 되었다. 


국방부는 1953년부터 병기탄약에 대한 제조기술의 완전해결과 최신식 제조연구시설이 연구조사 및 시설도입을 추진하였다. 결과적으로 국군은 그 해 안에 연구제조 기기를 목표량의 90%까지 도입 확보할 수 있게 되어 조병기술의 본격적인 연구개발에 주력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군수 병기분야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참고자료

육군본부 <<후방전사>> 육군본부, 1953.
국방부 <<한국전쟁사>>제1권 국방부, 1967.
국방부, <<국방사>> 제1집, 국방부, 1984.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신오성, 1995.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