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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백야전전투사령부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육군본부는 1951년 12월 호남지역에서 준동하고 있던 북한 공비의 규모가 아군전선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토벌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당시 북한은 이들 공비를 통해 아군전선 전후방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육본은 2개 사단 규모의 토벌부대를 편성하여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군단급 특수임무부대인 「백야전전투사령부 창설명령」을 하달하였다.

배경

1951년 말, 국군의 후방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공비들은 주로 북한군 패잔병과 호남, 영남지역의 지방공비들이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병참선을 차단하거나 후방 시설들을 파괴함으로써 아군의 후방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공군 신정공세 시 남쪽으로 진출하였던 북한군 일부가 주변산악으로 도주하여 지방공비들과 합류한 공비들이었다.

내용

지리산 공비는 남부군의 직속부대인 제81, 제92사단과 경남도당 사단인 제57사단, 그리고 전북도당 사단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여순 10.19사건 당시 반란군 출신 중 생존해 있던 인원과 북한군 전투부대의 낙오병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비교적 전투경험이 많은 병력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군으로서는 큰 부담이었으며 토벌작전 역시 큰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공비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과 덕유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국군과 유엔군의 보급로 차단, 식량약탈, 지서습격, 차량기습,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와 같은 만행을 자행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전후방 전력에까지 파급되었고, 민심은 극도로 동요되어 국민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키고 있었다. 


백야사는 작전명을 ‘쥐잡기’로 정하고 1951년 말부터 1952년 2월말까지 호남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전면 개시하였다. 수도사단과 제8사단의 6개 연대를 기동타격대로, 경비부대와 예비연대, 그리고 경찰부대를 저지부대와 거점수비대로 운용하였다. 이때 정부는 사전에 서남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사전조치를 취하였으며, 또 이 지역의 민간인 이동을 통제하고 마을 간의 전화교신도 차단하였다.


작전이 개시되자, 기동타격부대는 지리산을 남북으로 양분하여 북쪽은 제8사단이, 남쪽은 수도사단이 담당하여 공비 주력을 타격하였고 경찰 등 저지부대는 충분한 종심을 두고 배치하여 공비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에 공비들은 지리산 일대의 유리한 지형과 근거지를 버리고 토벌부대를 피해 분산되기 시작하였다.


백야사 예하 부대들은 계속하여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일대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공비잔당을 대부분 토벌하였고, 공비의 핵심지도자로 활동하였던 자들을 대부분 사살하거나 포획함으로써 작전을 마무리 지었다.


백야사의 전과는 작전기간 동안 사살 포로 투항 등을 포함하여 1만 6천여 명에 달했고 노획무기도 3천여 정을 상회하였다. 백야사는 수도사단에 작전임무를 인계하고 춘천으로 이동한 후, 화천에서 제2군단으로 재창설되었다.


백 장군은 훗날 “민심에 기반을 두었기에 토벌작전을 성공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으며, 문덕면 한천부락에는 당시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운 백선엽 송덕비가 세워져있다.

참고자료

국방부 <<한국전쟁사>>제6권 국방부, 1974.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대비정규전사>> 국방부, 1988.
백선엽 <<군과 나>> 대륙연구소, 1989.
육군본부 <<한국전쟁과 유격전>> 육군본부, 1994.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7.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