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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낙동강 방어작전

주제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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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원인

6·25 남침 이후 ‘낙동강방어선’은 국토의 90%를 북한군에게 빼앗긴 국군과 유엔군이 부산을 지키기 위해 1950년 8월 초~9월 중순까지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방어선이다. 이 방어선은 ‘부산교두보’또는 ‘워커라인 (Walker Line)’이라고 불려지기도 했으며, 양측은 이 선을 놓고 약 1달 반가량 처절한 작전을 수행하였다.


낙동강방어선은 남해안의 마산으로부터 북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낙동리까지 약 160㎞에 이르고, 여기서부터 동해안까지 약 80 ㎞의 산악 지대를 연결하는 선으로 이루어졌다. 지리적으로 방어선의 서측은 낙동강, 북측은 높은 산악 능선들로 이루어져 있어 비교적 방어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또한 부산을 중심으로 방어지역의 주요지점을 연결하는 종적, 횡적 도로망이 발달되어 있었다.

내용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으로부터 지연전을 실시하며 철수하여 낙동강방어선까지 물러났다. 이제 낙동강선을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방어선으로 결정하고 그곳에서 약 1개월 반 동안 결사적인 전투를 전개했다. 워커장군은 이곳에서 적의 전진을 일단 저지한 후, 이를 발판으로 활용해 총반격을 전개하려 했다. 


낙동강선에서 최후의 결전을 결심한 유엔군사령부는 부대의 특성을 고려해 작전 책임지역을 분할했다. 이에 따라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을 보유한 미군은 낙동강변 일원의 개활지를 담당하게 했다. 반면 낙동강 상류의 산악지대는 노무자들의 지게로 보급을 받아가면서 적과 싸우는 국군에게 부여했다. 


그리고 8월 1일에 내려진 철수명령에 따라 각 부대들은 낙동강전선의 지정된 책임지역으로 이동했다.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의 각 부대들은 8월 3일 밤까지 새로운 진지 점령을 대부분 완료했다. 그때부터 낙동강방어선의 북동쪽을 담당한 국군은 왜관으로부터 동쪽으로 5개 사단(제1.제6.제8.수도사단.제3사단)을 배치했다. 방어선의 남서쪽을 담당한 미군은 왜관으로부터 남쪽으로 3개 사단(제1기병사단.제24.제25사단)을 배치했다.


한편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추격해 8월 1일에는 대체로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했다.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수안보에, 제1.제2군단은 김천과 안동에 각각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8월 초부터 낙동강선에서 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은 상황이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혹독하고 무자비한 독전을 자행했다.


8월 한 달 동안 낙동강 방어선에서 계속된 치열한 전투로 북한군은 7만여 명의 병력과 많은 장비를 잃게 되어 공격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 국군은 유엔군의 증원과 함께 추가 징집 등을 통해 예전의 전력을 거의 회복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재일교포학도의용군 등 학도병의 지원은 총력전 태세를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낙동강전선에서 공방전을 치른 국군과 유엔군사령부는 그동안의 전투양상과 북한의 후방지원 능력 등을 감안할 때, 그들의 전력이 한계점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 같은 낙관적인 판단과 달리 북한군은 또 다시 9월 공세를 전개하였다.


9월 공세에서 전투는 어느 한쪽 편만 힘들고 고달픈 것이 아니었다.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9월 공세에 직면한 국군과 유엔군은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아군은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공세 이전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참고자료

육군사관학교 <<한국전쟁사>> 일신사, 1986.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1권, 국방부, 196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다부동전투>> 국방부, 1981.
양영조 외 <<한국전쟁>>(상) 신오성, 1995.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