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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건국기헌납운동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정부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항공기를 원조할 수 없다면 우리 손으로 구입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면서 정부, 국회, 언론기관을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의 호응을 받아 “우리의 비행기는 우리의 힘으로 구입하자”는 구호 아래 항공기 헌납운동을 전개하였다.

배경

정부 수립 후, 항공사령부는 여순10.19사건의 작전경험과 북한의 공군력 증강을 감안하여이승만 대통령에게 항공기의 필요성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9년 12월 7일 군사고문단장은 무초 대사를 통해 미 공군이 한국에 있는 고문단에 2명의 조종교관과 8명의 전문기술자를 할당해줄 것을 권고하였다. 


1949년 말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미국의 정책을 재검토하고 필요하다면 한국 공군의 지원을 포함하여 수정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의 권고에는 1950년 추가예산에 한국에 필요한 상호방위원조계획(MDAP)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내용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요구는 40대의 F-51전투기, 10대의 T-6훈련기, 2대의 C-47수송기를 비롯하여 통신장비의 지원에 필요한 2억 5천만 달러 등이었다. 그러나 미국 내의 반응은 군사고문단의 견해와는 달랐다. 급기야 1949년 2월 미 육군부 로얄 장관과 참모장 대리 웨드마이어 중장은 “한국은 과도한 군비부담을 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항공기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슈놀트 장군을 초청하여 한국측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맥아더 장군은 “한국의 국내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은 남북한간의 전면전쟁을 유발할 가능성을 증가시킬 뿐이다”라고 일축하였다. 


이에 이 대통령은 사회 각계각층의 호응을 받아 “우리의 비행기는 우리의 힘으로 구입하자”는 구호 아래 항공기 헌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목표액을 초과한 3억 5천만 원이 접수되었다. 이 헌금으로 캐나다 정부로부터 T-6 10대를 27만 불, 0.5인치 기관총 20정, 실탄 5,000발, 1년분의 부속품 3만 불 등 총 30만 불에 상당하는 무기를 구입하였다.


1950년 5월 14일 건국기 헌납명명식이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내외 귀빈들과 일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시장의 사회로 열렸다. 식순은 공보처장의 헌납사, 대통령의 찬사, 국방부장관의 수납사에 이어 국회의장과 무초 주한 미 대사의 공군발전을 위한 축사로 진행되었다. 명명식과 헌납기 사열이 끝난 후에는 진공식과 공중분열식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AT-6 항공기의 명명식에 대한 감격을 피력하였다. 


명명식에서 붙여진 항공기의 명칭은 국가의 건설과 국민의 애국심을 상징하기 위하여 총칭 건국기라고 칭하였다. 건국기에는 각기 개별적인 제호가 붙여졌다. 건국기를 조종한 10명의 조종사들은 김신 중령, 박희동 대위, 김영환 중령, 장성환 중령, 오점석 대위, 이근석 대령, 이상수 중위, 정영진 중위, 강호륜 중위, 장동출 중위였다.


이렇듯 1948년 4월 육군항공부대로 출발한 공군은 정부수립 후 건국기를 도입하여 전력을 갖추어갔다. 도입된 건국기는6.25전쟁 시 그나마 부족한 공군력을 메우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건국기는 전쟁 당시 주로 한국지상군의 전선 전면 및 적 후방공격, 전투기에 대한 공격목표유도, 작전연락, 지휘관 수송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아울러 정찰결과를 전선부대 및 육군본부와 미 제5공군사령부에 통보하여 작전수행을 원활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참고자료

국방부, <<한국전쟁사>>제1권, 국방부, 1967.
국방부, <<국방사>>제1집, 국방부, 1984.
양영조 외, <<한국전쟁>>(상), 신오성, 1995.
백기인, <<건군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