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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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명
발생배경
북한은 1966년 가을부터 대대적인 대남 무력 공세를 전개하였다. 이렇게 1960년대 후반 북한이 대대적인 대남 무력 공세에 나선 목적은 베트남 전쟁 지원과 남한 혁명을 통한 통일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김일성은 1966년 10월 〈조선노동자 대표자회의〉 연설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당시 북한은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대응하여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북한의 대남 무력 공세의 강화는 남한과 미국의 힘을 분산시켜 베트남 전쟁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결과를 의도한 행위로 볼 수 있다. 한편 1960년대 후반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이른바 남조선 혁명을 통한 조속한 통일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의 북한은 베트남 전쟁과 남한의 경제 성장에 자극 받아 이른바 ‘우리 세대 안의 통일’을 강조하면서 남조선 혁명과 통일의 조속한 달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국내정치적 맥락에서 볼 때 북한의 대남 무력 공세는 권력을 장악한 군부 강경파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이 주도한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대남 침투는 정보요원과 정치 공작원의 침투 수준을 넘어서 게릴라 기지의 구축을 위한 대규모 무장대 남파 등 현저하게 군사 행동과 결합되는 양상을 보였다.
내용
소위 1·21 사태라 불리는 1968년 1월의 청와대 습격 사건 역시 이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북한은 김신조를 포함한 31명의 게릴라를 남파하여 청와대를 습격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시도하였다. 공비 소탕에 나선 군경합동 수색대는 1월 30일까지 31명의 공비 중 자폭을 포함하여 27명을 사살하고 김신조를 생포하였다. 행방이 묘연해진 공비 세 명중 한명은 2월 중순에 경기도 양주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나머지 두 명은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편 한국 역시 민간인 7명이 사망하였고, 이익수 대령 이하 23명의 장병이 전사하였으며 부상자도 52명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북한의 도발적 군사 행동에 따른 남북한 사이의 군사적 긴장 관계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1968년 1월 23일 오후 원산 부근에서 작전 중이었던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군에 의하여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북한은 푸에블로호가 자신의 영해를 침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나포 당시 푸에블로호는 국제 공유 해역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이 푸에블로호를 나포하는 과정에서 미국 승무원 1명이 사망하였으며 나머지 82명은 모두 북한으로 피랍되었다. 이 사건 발생 직후 미국은 핵 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만 해역으로 급파하였다. 그리고 백악관에서 존슨 대통령 주재로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하여 북한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하였다. 더불어 미국은 유엔안보이사회를 소집하고 소련 측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존슨 대통령의 서한을 발송하였다. 나아가 1월 27일에 미국은 요크다운호, 구축함 1척, 잠수함 6척으로 편성된 기동함대를 원산만 해역에 동원하여 북한에 대한 무력시위를 벌였다.
역사적의의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은 한국군의 증강으로 연결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8년 2월에 그동안 여당과 야당 사이에 논란거리였던 250만 향토예비군의 창설을 발표하였다. 이 「향토예비군법」은 국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통과되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국군의 복무연한도 연장하였다. 한편 미국 역시 한국군의 증강을 지원하였다. 존슨 대통령은 푸에블로 사건 직후인 1968년 2월 8일 미국 의회에서 한국의 안보 위기를 고려하여 1억 달러에 이르는 추가적인 군사 원조를 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한국의 반침투 활동 강화를 위한 군사원조의 실행이라는 맥락에서 3,230만 달러의 군사 원조의 조속한 실행을 약속하였다. 또한 1968년 2월에한국을 방한한 밴스 특사 역시 박정희 대통령과의 회담 직후에 존슨 대통령에게 한국군의 증강을 위한 지원을 건의하였다.
한·미관계의 맥락에서 볼 때, 1968년 1월에 발생한 이 두 사건은 북한에 대한 대응 양식에 있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편차를 야기함으로써 동맹국 사이의 갈등을 야기하였다. 1·21 사태에 대하여 한국은 민감하게 반응하였지만 미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의 이러한 소극적 반응에 대하여 우려를 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신속한 대응을 보였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이러한 상반된 태도는 한국의 입장에서 납득하기 어려웠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이 북한에 대하여 초기의 군사적 대응의 모색이라는 강경책으로부터 북한과의 대화라는 협상으로 전환한 데 있었다. 푸에블로호 사건 초기에 한국은 이 두 사건은 북한의 도발적 행위라는 일관된 맥락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은 자신이 바라고 있던 북한에 대한 군사적 보복 조치를 미국의 힘을 빌려 실현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반면 미국은 두 사건의 필연적 연관성을 부정하였다. 그러면서 다양한 대응 방식을 논의한 끝에 결국 북한과의 협상을 모색하였다. 미국은 29차에 걸친 북한과의 일련의 비밀 협상을 통하여 1968년 12월 23일에 푸에블호 나포사건에 대한 북한과의 협상을 종결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협상이 비밀협상의 방식으로 전개되면서 미국에 대한 박정희의 불만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러한 불만과 더불어서 한국은 과연 미국이 차후에 예상되는 북한의 심각한 도발에 대하여 제대로 대응할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1968년 1월에 발생한 두 사건은 한국과 미국 사이의 관계를베트남 파병 이래로 형성된 우호적 밀월기로부터 갈등이 부각되는 상황으로 변화시킨 출발점이 되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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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