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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3선개헌과 한미관계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배경

민주주의의 발전이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권력집중은 결국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사태로 이어지게 된다.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신한당의 윤보선 후보를 116만표 차이로 따돌리고 낙승하였다. 그런데 박정희가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정치권의 관심사로 3선개헌 문제가 대두하였다. 당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2회 연임만 가능하였으나, 과연 박정희가 2번째 임기가 끝나는 1971년에 권좌에서 물러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1967년 6월에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공화당이 정부의 직간접적 선거 개입에 힘입어 일반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차지하여 개헌에 필요한 2/3의석을 확보함으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다.

내용

결국 박정희는 1969년 10월 17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대통령 연임관련 조항을 수정한 개헌안을 확정하였고, 이로써 자신의 집권을 연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3선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박정희는 이를 자신에 대한 신임투표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하였는데, 이러한 전략은 국민들의 선택을 제약하는 측면이 강했다. 당시 국민들은 개헌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동의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박정희가 갑자기 공직을 그만둠으로써 발생할지 모를 국정공백에 대해서도 우려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일반 국민들의 박정희에 대한 태도에는 양면성이 존재했던 것이었다. 부정부패와 강압적 통치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으면서도 그가 보여주는 강력한 리더십과 그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만족하는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박정희 이외의 다른 책임 있는 정치지도자가 가시화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박정희라는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의존현상이 어느 정도 나타나기 시작한 측면도 있다.


미국은 3선개헌을 둘러싼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는 자세를 취하였다. 당시 미국은 1968년1·21사태 및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이후 한국의 대북군사보복에 따른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 및 이에 대한 미국의 연루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하면서 한국에 대한 개입을 축소시켜가겠다는 방향으로 정책을 잡아가고 있었다. 또한 한국에 대한 개입축소 정책과 더불어 박정희 정권의 권력기반이 어느 정도 안정화 되어있으며 당장 박정희를 대신할 정치적 대안이 부재하다는 정치적 판단도 미국의 불개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의의

3선개헌을 통해 박정희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10월에는 자신의 영구집권을 가능케 하는 유신체제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박정희가 무슨 이유에서 집권연장을 꾀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국민들이 박정희가 보여준 리더십에 의존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은 어쩌면 박정희가 자신의 권력 연장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박정희가 권력을 독점하고 민주주의제도의 작동이 부식됨으로써 다른 정치지도자가 부상할 수 있는 기회가 크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들이 박정희 이외의 지도자를 상상하지 못했던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입장은 모두 부분적인 진실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박정희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고 민주주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권력연장 기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