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70년대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는 KBS방송을 통하여 북한 조선적십자회에 남북한 간의 이산가족찾기를 위한 적십자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 제의에서 대한적십자사는 남북 적십자사가 협력하여 1,000만 이산가족의 생사와 소재를 확인하고 그들에게 소식을 알려 주며 재회(再會)를 주선하는 등 가족찾기운동을 전개하자는 취지를 밝혔다. 북한 측은 이틀 후인 8월 14일 평양방송을 통하여 북한 조선적십자회는 남북적십자회담 개최에 동의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따라 시작된 제1·2차 회담에서 남북이산가족과 친척들의 주소 및 생사 확인, 자유로운 방문과 상봉, 자유로운 서신 왕래,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과 기타 인도적으로 해결할 문제 등 5개항의 의제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그러나 양 측은 이견(異見)을 좁히지 못하고 설전(舌戰)만을 계속하다가 교착상태에 빠졌다.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가 이산가족들의 인간적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남북 간에 적십자회담을 갖자고 제의하였으며, 북한 측도 이에 호응하였다. 다만, 북한 측은 이산가족 찾기의 대상은 친척·친우로, 사업은 자유 왕래, 상호 방문 등으로 확대하자고 하여 처음부터 남한의 반공 체제를 약화시키고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하여 적십자회담을 이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었다. 이러한 입장 차이로 예비회담은 9개월을 지체하였다.
1972년 6월에 이르러서야 의제 5개에 합의하고 본회담을 성사시켰는데, 이것은 남북 간에 의견 차이가 해소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진행되던 당국 간 비밀접촉에서 본회담을 성사시키자는 데에 양해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판문점에 적십자 상설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직통전화를 가설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남북관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적십자 본회담은 1972년 8월 29일~9월 2일 평양에서 제 1차 회담이 열린 이후 서울과 평양을 번갈아 가며 일곱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나, 북한 측이 남한의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등 정치적 문제 우선 논의 주장으로 일관함으로써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다가 북한 측이 1973년 8월 28일 남북조절위원회 회의와 함께 이 적십자 회담도 중단시키고 말았다. 이후에도 대표회의나 실무접촉을 이어갔지만 입장 차이를 좁히지는 못했다.
적십자회담을 거부해 오던 북한이 1984년 대남 수재물자 인도·인수가 끝난 직후 본회담을 속개하자는 우리 측 제의에 호응해 나왔다. 이로써 중단된 지 12년 만인 1985년 5월 27일∼30일 제8차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북한 측은 여전히 통일전선 논리에 입각한 자유왕래을 주장하여 진전이 없었으나, 시범사업으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을 교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대한 절차 협의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있었으나 당시 남북정상회담 문제를 둘러싸고 진행 중인 남북 당국 간의 비공개접촉에서 이를 성사시키자는데 의견이 모아져 1985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간에 이산가족과 예술공연단의 동시 교환방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한 측은 이어 개최된 제9차 및 제10차 적십자 회담에서 다시 기존의 입장으로 돌아가 의제 논의를 외면하고 고향방문단 교환사업을 계속해 나가자는 제의도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986년 1월 20일 팀스피리트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핑계로 북한 측이 진행되던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시킴으로써 1971년에 시작된 이산가족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위한 적십자 회담은 종료되었다.
1989년 9월부터 1990년 1월까지 제2차 이산가족 고향방 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적십자 실무대표접촉이 있었으나, 북한 측이 ‘꽃 파는 처녀’ 등 혁명가극을 공연하겠다고 고집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노부모 방문단 교환방문 문제에 대한 합의를 토대로 1992년 6월 5일부터 8월 7일까지 적십자 실무대표접촉이 진행되었으나, 핵문제 우선 해결과 이인모 노인의 송환 문제 등에 대한 입장 차이로 무산되었다. 그 후 1997년에 이르러 북한의 식량난이 긴급해짐에 따라 대북 물자 지원을 위한 적십자 실무대표접촉이 다섯 차례 진행되었다.
2000년 이후부터 남북 이산가족들 간에 본격적인 교류와 상봉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서울과 평양, 그리고 금강산에서 단체로 상봉이 이루어지고 화상 상봉도 병행되었으며, 생사·주소 확인, 서신교환 등 방식도 다양해졌다.
2000년 6월 적십자회담에서 8·15이산가족방문단 교환(2000년 8월 15일∼8월 18일)에 합의하였으며 2000년 9월 적십자회담에서는 이산가족방문단 추가교환(2000년 11월 2일∼4일, 12월 5일∼7일, 각 100명씩)과 함께 생사·주소확인과 서신교환에 대한 합의를 했다.
2001년 1월 적십자회담에서는 이산가족방문단 교환(2001년 2월 26일∼28일)과 함께, 300명의 서신교환에 대한 합의를 하였으며, 2001년 9월에는 이산가족면회소 설치, 이산가족 생사 주소확인, 서신교환과 이산가족 상봉(2001년 9월 13일∼18일)을 각각 100명씩 하자는 데 합의했다.
2006년 2월 적십자회담에서는 ‘6·15 공동선언’ 특별상봉으로 각각 200명씩, 화상상봉으로 60가족씩 하는 것에 합의하였다. 2007년 4월 적십자회담에서는 국군포로·납북자에 대한 생사·주소 확인, 이산가족 대면·화상 상봉 및 영상 편지 시범실시 등 7개 문항의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또한, 남북한은 금강산 지역에 이산가족면회소를 건설하기로 합의하여 2008년 7월 12일에 완공하였다.
그러나 2008년 7월 북한군에 의한 우리 측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이후 전반적인 남북관계의 악화와 함께, 이산가족면회소의 개소가 잠정 보류되었다. 2009년에 들어와서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위한 적십자회담(2009년 8월 26일∼28일)이 개최되어 추석 남북이산가족 상봉(2009년 9월 26일∼10월 1일)이 실시되었다. 또한, 2010년에는 3차례의 적십자실무접촉을 통해 이산가족상봉행사 및 차기 적십자회담 개최에 합의하여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6박 7일간 이산가족상봉행사가 금강산에서 개최되었다. 2010년 10월 26일부터 27일까지 개최된 적십자 회담에서 이산가족문제 해결 등을 계속 협의하기 위한 2010년 11월 25일 적십자회담 개최에 합의했으나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2010년 11월 23일)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