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국대학관제」(1924년5월2일, 칙령 제103호)
「경성제국대학학부」(1924년5월2일, 칙령 제104호)
「경성제국대학예과규정」(1924년5월2일, 부령 제21호)
3·1운동을 계기로 조선에서 고등교육을 실시하지 않는다는 식민당국의 교육정책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조선인들의 해외유학생 수가 급증하고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비등하고 있는데다가, 민간자본으로 민족주의 대학을 건설하려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조선에서의 대학 설립은 식민당국으로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22년에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대학을 설립할 수 있는 법적인 조치를 마련하고 1924년도에 이미 신입생을 모집하였으나, 아직 식민당국은 조선에서의 대학교육에 관한 구체적인 법규정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1924년 5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경성제국대학관제」가 제정·공포됨으로써 식민지시기의 유일한 대학기관이 설립될 수 있게 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대학예비과정으로 예과를 두었고, 학부과정으로는 1926년부터 법문학부와 의학부만을 설치하도록 하였으며, 이공학부는 1941년에 개설되었다.
「경성제국대학관제」를 제정·공포함과 동시에 “경성제국대학은 제국대학령에 의한다”는 칙령 제105호도 함께 공포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1918년에 제정된 「대학령」에 의해 제국대학 이외에도 국·공립 및 사립대학을 대학으로 인가하여 고등교육시설을 확대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대학령」이 아니라 「제국대학령」에 의해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1886년에 제정된 일본의 「제국대학령」은 “국가의 수요에 부응하는 학술과 기예를 교수하고, 그 온오를 고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여, 고도로 국가주의적인 대학교육을 명문화하고 있는 법령이었다. 결국 경성제국대학은 「제국대학령」에 근거하여 설립됨으로써, 조선인의 고등교육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제국주의의 필요에 부응하는 학술기관이라는 성격을 처음부터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은 또한 당시 민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어온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경성제국대학관제」에서는 대학예비과정으로서 예과를 두도록 하고 있다(제4조). 일본의 다른 제국대학들과는 달리, 경성제국대학은 대학예과를 설치하고, 대학예과로부터 대학학부로 자동 진학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당시에 일본의 제국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대학교육 준비기관인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고, 다시 고등학교 졸업자는 대학 입학시험을 통과해야했다. 일본의 제국대학 가운데 경성제국대학과 같이 대학예과를 둔 곳은 홋카이도제국대학이 유일했다. 또한 「경성제대예과규정」에서 대학예과의 수업연한을 2년으로 규정하였는데(제2조), 이는 수업연한이 3년인 일본의 고등학교와도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경성제국대학 예과에서는 3년간의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2년만에 속성으로 마쳐야만 했고, 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다가, 결국 1934년부터 예과의 수업연한은 3년제로 연장되었다. 이처럼 경성제국대학에 예과를 설치한 것은 조선에 대학 예비학교인 고등학교를 따로 설립하지 않은 채 민간의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대응하여 조속하게 관립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던 조선총독부의 정책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은 발족 당시에 법문학부와 의학부만으로 학부과정을 구성하고 있었다. 전문학교만으로는 부족한 고급의 의료 인력을 충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 수준의 의학부 설립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그런데 법문학부는 학생들의 전공이 상이한 법학부 및 철학·사학·문학과의 문학부가 병존하는 형태로서, 일본에서는 도호쿠대학 및 규슈대학에 도입되어 있었다. 물론 조선총독부가 법문학부라는 상이한 두 개의 학부를 하나로 통합하여 설치하기로 했던 것은 대학설립의 비용을 고려한 것이었지만, 이는 해방 당시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학부 구성은 또한 당시 조선 사회의 고용구조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조선 사회에서는 고등인력을 수용할만한 근대적 경제부문의 성장이 취약했기 때문에 조선인 학생들이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법학에 대한 강한 지향성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또한 중등교육이 확대되면서 새로운 교원 수요에 충당하도록 문학부를 설치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농학부나 이·공학부는 전적으로 비용상의 이유로 설치가 유보되고 있었다. 이후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고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고자 하는 식민지 지배정책의 변화와 더불어 1938년에서야 비로소 경성제국대학의 이공학부 설치가 인가되었고, 1941년에 이공학부가 개설될 수 있었다.
경성제국대학에 학부가 개설되고 본격적으로 대학교육이 진행되면서, 「경성제국대학관제」에서는 대학조직과 학부운영상의 원칙으로 강좌제를 명시하였다. 교수는 각 학부에 속하여 강좌를 담임하고 학생을 교수·지도하도록 하였고(제3조), 조교수는 교수를 도와 수업 및 실험에 종사하며(제4조), 조수는 교수 혹은 조교수의 지도를 받아 학술에 관한 사무를 보도록 하고 있다(제8조). 이처럼 강좌제에서는 한 명의 교수를 정점으로 조교수와 조수가 수직적으로 이어져 교육 및 연구의 기초단위로서 하나의 강좌를 형성하고 있는 체제였다. 대학교육의 강좌제 모델은 일본의 제국대학이 갖는 특징적인 성격으로, 학문 및 전공의 전문성을 강조하고 그 책임을 교수에게 맡김과 동시에 강좌간의 학문적 경쟁을 유발하려는 제도였다. 경성제국대학에서도 이러한 강좌제를 채택하고 대학에 설치하는 강좌명 및 강좌수는 칙령으로 제정하여 법제화하였다. 이러한 강좌들은 1941년 현재 법문학부에 51강좌, 의학부에 29강좌, 이공학부에 24강좌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만규,《조선교육사》 거름, 1988
정재철,《일제의 대한국식민지교육정책사》 일지사, 1985
文部省敎育史編纂會 編, <明治以降敎育制度發達史> 龍吟社, 1939
정선이,《경성제국대학연구》 문음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