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이후 강제병합 이전까지 근대적인 교육체제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범정부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었지만, 고등교육의 발전은 매우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초등교육의 보급과 근대적인 교원을 양성하는 문제가 당장의 급선무였기 때문에, 중등교육 나아가 고등교육을 보급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1894년 중앙정부 조직개편으로 설립된 학무아문에서는 전문학교 및 대학교에 관한 사무를 관장 업무로서 명시하고 있으나, 이듬해 1895년의 학부 업무에서 대학교육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통감부 시기에 이르기까지는 체계적이고 완결적인 학제상의 편제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 문서에서는 중학교, 실업학교, 전문학교를 구분하고는 있었지만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단계를 구분하여 확정하는 일도 용이하지 않은 형편이었다. 이러한 중앙 및 지방정부에 의한 교육개혁과 관·공립 학교시설의 보급보다도, 오히려 당시에는 민간부문에서의 학교 설립 및 운영에서 보다 앞선 노력들이 있었다. 학교에 따라서는 고등교육 수준의 교육과정을 설치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는 사립학교들도 있었다.
갑오경장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근대적인 개혁이 시작될 무렵까지도 성균관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과거제 폐지와 더불어 근대적인 교양을 갖춘 인재 양성의 필요성으로부터 성균관에 대한 개혁은 불가피했다. 1895년에 「성균관관제」가 제정되면서 기존의 성균관에 대해서는 문묘에 대한 제사 기능과 유학 경전에 대한 교육 기능으로 구분되어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균관에 경학과를 설치하여 유학 경전에 대한 학습은 물론이고 근대적인 교과목들을 함께 교수하여 성균관의 교육 기능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경학과는 고급 관료군을 양성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이 외에도 근대적인 개혁에 필요한 전문적인 고급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각종의 전문적인 학교들도 설립하기 시작했다. 초등교육의 보급에 따라 근대적인 교원을 양성할 목적으로 1895년에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된 것을 비롯하여, 법관이나 법률관계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법관양성소, 그리고 외국어학교나 의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정부 차원에서 근대적인 관료나 전문적인 고급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고등교육기관을 마련해가고 있었다면, 민간영역에서는 보다 일반적인 전문학교 수준의 학교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미 1905년에는 한성법학교, 경성전문학교, 양정의숙, 숭실학당 대학부 등이 설립되어 있었으며, 1908년에는 대동전문학교, 이화학당 고등과, 배재학당 대학과, 경신학교 대학과 등이 설립되었다. 또한 중경의숙과 돈명의숙도 전문학교 수준의 과정을 설치하고 학생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학교들은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정책과 고등교육 억제정책으로 인해 대학 수준의 학교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1910년의 한일강제병합은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발전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식민당국은 조선에서의 교육정책을 마련하면서, 대학교육을 비롯한 고등교육은 실시하지 않으며, 전문교육조차도 초등 및 중등교육이 충분히 성장하기를 기다려 실시한다는 유보적인 정책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운영되어 왔던 관립의 전문학교들은 폐교되거나 강습소 및 실업학교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또한 전문학교 수준의 사립학교들에 대해서도 인가를 취소하여 정규학교가 아닌 각종학교 수준으로 전락시키거나 폐교를 유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민간의 사립교육에 대한 억제 수단으로 제정된 「사립학교규칙」은 1915년에는 더욱 강화된 형태로 개정되었다. 이와 함께 식민당국은 1915년에 「전문학교규칙」을 제정하여 전문학교를 설립·운영할 수 있는 법규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식민당국은 새롭게 전문교육 시설을 설립하여 전문교육의 확대를 도모하는 대신에, 기존에 축소·격하된 채로 존속하던 학교들을 다시 전문학교로 승격시키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경성전수학교(법학전문학교)가 전문학교로 개편되었고,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 의학강습소는 경성의학전문학교로, 경성공업전수소는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그리고 수원농림학교는 수원농림전문학교로 각각 승격되었다. 한편, 사립학교에 대해서는 교과목에 대한 통제를 한층 강화하고 설립과 인가에 관한 기준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등 단 2곳만이 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3·1운동을 계기로 그동안의 식민지 통치 정책상의 변화가 불가피하였고, 1922년에는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어 대학교육을 비롯한 고등교육을 실시한다는 방침이 확정되었다. 기존의 「전문학교규칙」은 폐지되었고 「공사립전문학교규정」이 새롭게 제정되어 전문학교의 설립 조건이 다소 완화되었다. 사립으로는 1922년에 보성전문학교가, 1925년에는 숭실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이후에도 경성치과전문학교(1929년), 경성약학전문학교(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1930년, 혜화전문학교) 등의 전문학교 설립이 이어졌다. 관·공립으로는 경성고등상업학교(1922년)와 대구와 평양의 의학전문학교(1923년)가 설립되었다. 이 외에도 전문학교 수준의 학교로는 중앙보육학교, 경성보육학교, 경성법정학교, 성결교회경성신학교, 조선무선통신학교, 평양신학교, 덕원신학교 등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교육령」이 다시 한 번 개정되는 1938년 이후에는, 관립으로 경성광산전문학교(1939년)와 부산고등수산학교(1941년)가 설립되었고, 사립으로는 숭실전문학교가 폐교되고, 대동공업전문학교(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1938년), 숙명여자전문학교(1939년), 명륜전문학교(1942년) 등이 신설되어 관·공립 및 사립으로 총 20개교의 전문학교가 설립·운영되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이 확대되는 식민지 말기에 이르면 문과계 전문학교는 이공계로 개편되거나 강제로 축소·통합되기에 이른다.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는 1944년부터 학생 모집을 중단하고 경성경제전문학교로 통합되었다.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는 각각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와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전환되었으며, 혜화전문학교는 폐쇄되고 명륜전문학교는 청년연성소로 전환되었다. 또한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숙명여자전문학교도 각각 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로 전환되었다.
한편, 식민지시기 설립된 대학기관으로는 경성제국대학이 유일했다. 1922년 「조선교육령」에서 대학교육 실시 방침을 천명하기는 하였으나, 조선에 설립되는 대학의 형태에 관해서는 일본 정부와 식민당국 내에서도 견해차가 컸다. 1924년 봄에 이미 신입생을 모집하고도 1달이 지난 뒤에서야 「경성제국대학관제」가 제정·공포됨으로써 조선의 유일한 대학기관은 비로소 법적인 기반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일본의 제국대학 모델을 도입한 것이었지만, 일반적인 제국대학과는 달리 대학예비과정으로서 2년 과정의 예과를 두었고, 학부과정으로는 법문학부와 의학부만을 설치하고 있었다. 1934년부터 예과과정은 3년으로 연장되었고, 1941년에 이르러서야 이공학부가 개설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개화기 이후부터 성균관의 개혁과 근대적인 전문분야의 인력을 양성하기 시작하면서 발전해온 고등교육은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정책과 고등교육 억제정책으로 매우 더디게 성장해 왔다. 양적인 측면에서만 보아도, 고등교육기관에 재학하는 조선인 학생수는 1912년의 67명에서 1942년까지도 불과 4,505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조선인 총인구 1만명당 1.8명에 해당하는 수치이며, 전체 학생 인구 중 겨우 0.2%라는 매우 특수한 집단에게만 주어진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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