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제정된 조선총독부의「삼림령」및 부속법령(삼림령시행규칙, 삼림령시행의 건, 삼림령시행수속 등)
1961년 제정된 「산림법」
1962년 제정된 「산림법시행령」 및 「산림법시행규칙」 등
일제는 1910년의 임적조사사업과 「의견서」에 기초하여,「삼림법」1908)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강제적으로 창출된 광대한 국유임야를 보다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1911년 6월「삼림령 및 부속법령」을 제정하고「삼림법을 폐지하였다.「삼림령」은 전문 30조로 구성된 간단한 법령이었지만 식민지 전 기간동안 산림정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이 법령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조림대부에 관한 사항으로서,「삼림령」 제7조에 의하면 “조선총독은 조림하기 위하여 국유삼림의 대부를 받은 자에 대해서는 사업을 성공한 경우 특히 그 삼림을 양여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이 조항 그 자체로는 조림대부제도의 목적이 황폐된 한국 산림의 녹화를 위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림대부제도는「삼림법」의 부분림제도가 일본인에 대한 국유림양여수단으로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강력한 일본인 식민 및 일본인 자본의 유인정책이 절실히 요구됨에 따라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이 부분림제도를 폐지하는 대신에, 불요존국유림을 대부하여 조림사업이 성공하면 국유림을 양여하는 수단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 조항에 의한 조림대부의 실적을 보면, 일제에 의한 일본인의 한국 산림점유 의도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특히 국가가 관리해야 할 국유임야를 일반인에게 조림시켜 양여하겠다는 계획은 북해도를 제외한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식민지에서의 임야수탈 방법이었다(산림청, 1997).
<표 1> 조림대부처분 실적의 추이(1910∼1941)
연 도 | 건 수 | 면 적(정보) | |||||
일본인 | 한국인 | 총 계 | 일본인 | 한국인 | 총 계 | ||
총 독 부 전 기 | 1910 | 4 | 9 | 13 | 534 | 316 | 850 |
1911 | 14 | 36 | 50 | 483 | 526 | 1,009 | |
1912 | 76 | 3,008 | 3,084 | 5,425 | 7,108 | 12,533 | |
1913 | 232 | 7,838 | 8,070 | 42,847 | 27,087 | 69,934 | |
1914 | 246 | 7,179 | 7,425 | 48,836 | 48,484 | 97,320 | |
1915 | 190 | 8,822 | 9,012 | 10,762 | 37,297 | 48,059 | |
1916 | 173 | 6,410 | 6,583 | 15,852 | 44,940 | 60,792 | |
1917 | 109 | 2,664 | 2,773 | 23,929 | 50,602 | 74,531 | |
1918 | 172 | 910 | 1,082 | 61,493 | 36,154 | 97,647 | |
1919 | 189 | 691 | 880 | 52,560 | 34,518 | 87,078 | |
1920 | 109 | 924 | 1,033 | 37,533 | 29,413 | 66,946 | |
1921 | 127 | 996 | 1,123 | 29,855 | 34,082 | 63,937 | |
1922 | 169 | 1,275 | 1,444 | 49,345 | 38,698 | 88,043 | |
1923 | 117 | 1,191 | 1,308 | 31,486 | 13,651 | 45,137 | |
1924 | 101 | 1,536 | 1,637 | 30,023 | 35,571 | 65,594 | |
1925 | 71 | 1,200 | 1,271 | 20,965 | 10,340 | 31,305 | |
소계 | 2,099 | 44,689 | 46,788 | 461,928 | 448,787 | 910,715 | |
평균 | 131 | 2,793 | 2,924 | 28,871 | 28,049 | 56,920 | |
평균/1인 |
|
|
| 220 | 10 | 19 | |
총 독 부 중 기 | 1926 | 80 | 821 | 901 | 21,431 | 19,597 | 41,028 |
1927 | 45 | 296 | 341 | 17,479 | 34,489 | 51,968 | |
1928 | 86 | 606 | 692 | 25,911 | 28,302 | 54,213 | |
1929 | 29 | 211 | 240 | 11,550 | 9,684 | 21,234 | |
1930 | 27 | 2,736 | 2,763 | 7,647 | 21,445 | 29,092 | |
1931 | 18 | 5,502 | 5,520 | 33,540 | 32,802 | 66,342 | |
1932 | 27 | 8,518 | 8,545 | 42,878 | 43,966 | 86,844 | |
1933 | 16 | 8,691 | 8,707 | 30,437 | 52,137 | 82,574 | |
1934 | 3 | 6,847 | 6,850 | 14,911 | 28,773 | 43,684 | |
소계 | 331 | 34,228 | 34,559 | 205,784 | 271,195 | 476,979 | |
평균 | 37 | 3,803 | 3,840 | 22,865 | 30,133 | 52,998 | |
평균/1인 |
|
|
| 622 | 8 | 14 | |
1910∼1934년 합계 | 2,448 | 79,924 | 82,372 | 642,118 | 720,001 | 1,362,119 | |
비율(%) | 3.0 | 97.0 | 100.0 | 47.1 | 52.9 | 100.0 | |
평균면적 | 2,430 | 3,157 | 5,587 | 26,708 | 28,799 | 55,507 | |
면적/인 |
|
|
| 275 | 9 | 17 | |
1935∼1941년 합계 | 714 | 394,487 | |||||
총 계 | 83,086 | 1,756,606 |
자료: 배재수 외, 2001,《한국의 근·현대 산림소유권 변천사》에서 재인용w
조림대부처분의 실적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보면, 총독부 전기와 중기를 불문하고 출원건수 면에서는 한국인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하였다(표 1). 그러나 출원건수의 추이를 보면, 민족 간 약간의 차이를 보여준다. 일본인의 경우 총독부 전기에 연평균 131인이 출원하였으나 총독부중기에는 연평균 37인으로 전기에 비해 28%의 수준에 머물렀다. 또한 출원면적은 전기에 연평균 28,871정보였으나 중기에는 22,865정보로 전기에 비해 79%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반면에 출원건수 당 면적을 보면 전기는 일본인이 220정보였으나 중기는 622정보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원인은 조림대부 대상면적의 감소로 인한 취득곤란이 하나의 원인이고 다른 하나는 대자본을 지닌 일본의 독점자본과 만주사변(1931) 이후 안정적인 목재공급을 필요로 하는 일제의 정책이 맞물려 나타난 현상이다. 이는 1934년의 경우 1건수 당 약 5천정보에 이르게 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총독부 전기에는 일본인 식민을 위해 소면적(한국인에 비해서는 대면적이지만)으로 다수의 일본인에게 대부되었지만, 총독부중기에는 대규모 펄프공업자본 및 국책회사자본과 긴밀히 연결되어 대규모 산림을 소수의 일본자본가에게 대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일본자본에 의한 식민지 조선에서의 산림수탈은 삼림령의 조림대부제도를 통하여 일본인의 이민과 국책회사인 동양척식(東洋拓殖)주식회사, 대재벌인 주우(住友)합자회사, 삼정(三井)합명회사, 산하(山下)합명회사, 주식회사 중촌조(中村組) 등을 앞세워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조림대부 실적의 건수 및 면적을 민족별로 구분하여 보면, 1910년부터 1934년까지 총 조림대부 처분 중, 일본인에 의한 조림대부의 건수는 2,448건으로 3%에 불과하였지만, 대부면적은 642,118정보로 47%인 절반 정도를 차지하여 일본인 자본의 산림소유 집중을 잘 알 수 있다. 더구나 일본인 1인당 조림대부 면적은 275정보로 한국인의 9정보에 비해, 약 30배 규모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1910년부터 1941년까지의 조림대부의 실적을 보면 총건수 83,086건, 총면적 1,756,606정보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약 54%인 952,330정보가 성공 양여되었으며, 반환된 것은 단지 8%인 137,494정보에 불과하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이후 적산(귀속재산)으로 분리된 산림이 남한에만 약 48만정보였다는 것을 볼 때, 일본인의 임야획득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2> 해방이후 조림대부 성공양여 실적
연 도 | 양여면적(정보) | 비율(%) | 연 도 | 양여면적(정보) | 비율(%) |
1950 | 3,616.1710 | 8.4 | 1965 | 5,373.4217 | 12.5 |
1954 | 3,066.2600 | 7.1 | 1967 | 264.4500 | 0.6 |
1955 | 4,373.5000 | 10.2 | 1969 | 259.6700 | 0.6 |
1957 | 42.6000 | 0.1 | 1970 | 20,441.6500 | 47.5 |
1959 | 4.5600 | - | 1971 | 683.6114 | 1.6 |
1963 | 946.4900 | 2.2 | 1972 | 4,002.5322 | 9.2 |
계 | 43,074.9163 | 100.0 |
자료: 배재수 외, 2001,《한국의 근·현대 산림소유권 변천사》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