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전작물증산계획
총독부는 식량부족 완화, 식량수입으로 인한 외화유출 방지, 일본으로의 미곡이출 확대 등을 위해 1931년부터 전작개량증산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후 잡곡 증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수이입 초과수량이 연간 140만석 내외에 이르고 있었다. 이처럼 잡곡의 증식계획이 예정된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에 대해 당시 농림국장은 지도요원 부족, 개량사업의 미흡, 자급비료의 증산․금비의 배급 및 증투에 대한 대책 부족 등을 그 원인으로 지적하였으나, 사실은 계획 수립 당시부터 식량밭작물증산에 대해 총독부가 적극적인 정책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원인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잡곡 증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가운데 1939년 미증유의 가뭄, 1940년 7월의 장마, 전쟁의 장기화 등으로 식량난이 가중되자, 총독부는 국내의 식량난을 해소하고 일본으로의 미곡 이출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잡곡에 대한 개량 증식계획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1941년부터 5년간 주요 식량인 맥류(대맥, 소맥, 나맥)와 조를 대상으로 한 식량전작물증산계획을 실시하였다.
식량전작물증산계획은 5년간 재배면적을 25만정보 확장하여 총 179만1천정보에서 대맥 1,110만2천석(312만5천석 증), 나맥 423만2천석(125만8천석 증), 소맥 333만1천석(130만3천석 증), 조 556만1천석(57만6천석 증), 합계 1,866만5천석(568만8천석 증)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맥류는 재배면적과 단보당 수량 모두 확대하는 반면 조는 다른 증산계획작물과의 경작 충돌을 막기 위해 재배면적을 오히려 10만8천정보 줄이고 대신 경종법 개선, 병충해 방제 등을 통해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증가시켜 총 생산량을 늘리기로 하였다. 총독부는 이와 같은 목표를 위해 다음과 같은 대책을 마련하였다.
① 품종개량시설
- 맥류 신품종 육성 시설 : 육성 시설을 본부 농사시험장에 신설.
- 맥작 지정 시험 실시 : ㉠ 본부농사시험장에서 육성한 계통의 선정 및 생산력 검정시험과 특성 조사, ㉡ 전작 및 이작에 대한 종합적인 경제시험, ㉢ 정지방법 및 간단한 지개량에 관한 시험, ㉣ 비료시험을 위해 전남, 경북, 평남 도시험장에 산업기수 1명씩 배치하고, 인건비 및 시험비로 1개 도에 대해 계획실시 제1차 연도에 2,795엔,그리고 제2차 연도부터는 1,795엔을 보조.
- 맥류 우량품종의 보급 및 갱신 : 대맥, 소맥, 과맥(=나맥, 이하 동일) 재배 목표 면적의 70-80%에 대해 3년간 우량품종의 보급 및 갱신을 끝내기 위해 계통 채종전을 설치하여 소요 종자를 증식하고 채종전 경영비에 대해 원종전 단보당 60엔, 군·도 채종전 단보당 대맥 24엔36전, 과맥 33엔80전, 소맥 32엔76전, 부락 채종전 단보당 2엔50전씩 보조.
② 작부확장장려시설
- 논 이작맥 배수시설 : 신규 확장면적 10만정보 가운데 1만정보에 대해 5년간 소규모 간이암거배수 시설을 설치하여 작부를 확장하는데 이에 대한 공사비 22엔/단보당 가운데 6엔을 보조.
③ 병해방제 시설
- 맥류 및 조 종자 소독 : 원종전, 채종전에 사용하는 종자에 대해 방제용 기구 비용과약제비의 일부를 보조.
④ 강습회 개최
- 밭작 증산개량 강습회비 보조 : 군·도·읍면 및 농회 기술원에 대한 강습회와 독농가 및 중심인물에 대한 전습회를 개최하고 그 경비를 보조.
⑤ 경작회 및 품평회 개최
- 다수확 경작회, 부락채종전 품평회비를 개최하고 경비를 보조.
⑥ 전임직원 설치
단백질 보충 작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금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지력 유지상 매우 중요하고 일본에서 두부, 된장 원료로 명성이 높은 조선 대두에 대해서도 증산 요청이 있어 총독부는 1943년부터 1947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품종개량과 재배면적확장, 재배방식 전환 등을 통해 1947년 19만3,600정보에서 19만3,600만석을 증수하기로 하였다.
총독부는 잡곡에 대한 개량증산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재배면적을 늘리기 위해 밭 개간사업도 실시하였다. 1942년부터 개전(開田)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민유 임야를 매년 1만 정보씩 5년간 5만 정보를 밭으로 전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43년부터 이 계획을 확대하여 10년간 10만정보의 밭을 개간하는 계획을 실시하였다. 이 계획은 1단보당 5엔의 보조금을 지급하여 유휴임야, 황무지 등을 개간하여 주로 잡곡, 고구마, 감자, 각종 야채를 증산하는 것인데, 특히 종전에 억제해오던 임야의 화전식 개간도 일부 인정해 증림(增林) 예정지 등의 일부도 밭으로 개간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당시 식량 사정이 매우 긴박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또 1944년 10월에는 상습 가뭄 논 10만정보를 밭으로 전환하고 21만정보에 대해서는 대작을 실시하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한편 총독부는 잡곡의 생산과 공출 확대를 유도하기 위해 잡곡의 매입가격을 인상하고, 보급금을 지불하는 조치도 취하였다. 물론 총독부의 지불금이 전액 모두 생산자에게 지불되는 것은 아니고 각 생산물별로 석당 1엔씩은 맥류 및 기타 전작 증산에 필요한 시설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총독부의 여러 가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밭식량작물증산계획은 제대로 이루지지 못하였다. 맥류의 경우 1940년대 생산량이 계속 감소(대맥, 소맥, 나맥 모두 감소)하다 1944년 1천271만2천석으로 급증하였지만 1944년 목표 생산량 1천625만9천석의 78.2%, 또 좁쌀의 경우 1944년 391만7천석으로 1943년의 401만석 다음으로 많은 생산량인데 역시 1944년 목표 생산량 549만6천석의 71.3%에 불과하였다. 한편 대두의 경우 매년 증감을 반복하다 1944년 생산량은 목표 생산량 272만2천석의 99.0%를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1933년 생산량의 59%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朝鮮總督府,《重要農林産物增産計劃の槪要》, 1941
朝鮮總督府,《重要農林産物增産計劃の槪要》,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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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촌경제연구원,《한국농업․농촌 100년사》상, 농림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