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농지설정에 관한 건》
1920년대 소작문제가 점점 심각해지자 총독부는 1920년대 후반 소작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총독부는 소작문제 해결을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입법이 필요하지만 이를 준비하는 데 있어 일의 성격상, 그리고 그 외의 사유로 신속하게 완벽을 기하기 어렵다'는 이유로「소작입법」대신 1928년 7월 26일 각 도지사에게 응급조치로서 「소작관행 개선에 관한 건」을 통첩하여 소작관행에 대해 행정지도를 명령하고, 1929년 9월부터 일부 지역에서는 소작관 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1930년 공황을 계기로 소작쟁의가 더욱 심해지고 농민층을 목표로 한 사회주의운동 또한 더욱 활발히 전개되자 총독부는 종전의 미온적인 소작제도개선책의 한계를 인정하고,「소작입법」을 본격화하기로 하고 그 일환으로 1932년 10월자작농지설정사업 시작을 지시하였다.
총독부는 '자작농의 민멸(泯滅)은 바로 지주 소작인의 대립으로 되고 소작쟁의를 빈발하게 하게 하여 농촌의 평화를 해치고 또한 생산기술의 발전을 저해하며, 농업개량 및 농촌 진흥을 방해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이런 농업계의 질환을 근치(根治)하고, 농업의 개량과 건실한 농촌의 발달을 꾀하는 것은 극히 긴요한 일이다' 고 소작쟁의 빈발과 관련하여 자작농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1932년 10월 11일 각 도지사에게 통첩 「자작농지설정에 관한 건」을 보내 자작농지설정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목적 : 소작농에게 토지를 소유하도록 하여 이들을 중핵으로 사상과 경제가 모두 불안정한 농촌의 갱생을 꾀하고 또한 이촌부랑의 폐를 방지한다.
▶설정 규모 : 1농가당 구입 농지는 논 4단보, 밭 1단보를 표준(5단보 농가)으로 하여 1932년 이후 매년 설정농가 2천호, 설정면적 1천정보씩 10년간 2만호, 1만정보를 설정한다. 설정농가는 도별로 할당하는데, 1932년의 경우 평남 150호, 평북 100호, 강원 70호, 함남 50호, 함북 30호이고 그 외 중부와 남부지방 각도는 200호씩 할당한다.
이상 사업의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무엇보다도 우선 지적할 점은 계획의 규모가 너무 영세하여 과연 총독부가 제시한 자작농지설정사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하는 점이다. 당시 농가의 평균 경작규모가 소작농의 경우 논 0.49정보, 밭 0.55정보, 합계 1.04정보였고, 자소작농의 경우 논 0.95정보, 밭 1.61정보 합계 2.56정보였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창설농지규모의 영세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더욱이 그것도 25년간 고율의 소작료와 비슷한 수준인 대출자금을 갚아야만 비로소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었다. 또 10년간 설정 규모 2만호, 1만 정보는 1932년 자소작농 2,289천호의 0.9%, 소작지 약 2,482천정보의 0.4%에 불과하고 특히 당시 소작농이 연간 5~6만호씩 늘어나고 있는 상황과 비교해 볼 떄 너무 빈약한 사업이었다. 이처럼 자작농지설정사업이 일본과 달리 소규모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빈약한 재정과 필요한 토지 확보의 어려움이 그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빈약한 '5단보 농가'를 목표로 한 자작농지설정사업을 실시한 정책의도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5단보는 너의 것이다. 열심히 일해 그 다음은 구입하여라. 한편으로는 소작권이 확립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일하면 구입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작농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슬로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총독부는 설정농가를 철저히 지도하여 소농민의 ‘근로정신’을 고취시켜 자가노동의 강화뿐만 아니라 가족노동도 강화하여 '근로주의와 농사의 모범을 전파'시키는 농촌진흥의 정신운동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농촌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던 사회주의 계급투쟁, 민족해방운동으로부터 소작인들을 격리시켜 식민지 통치체제를 안정시키려는 의도도 내재되어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정책 의도 때문에 설정인물의 선정과 설정 후의 철저한 지도·감독이 매우 중시되었다. 1932년 10월 정무총감 통첩에 의하면 설정농민은 “농촌의 중견인물로 지조견실하고 또한 근로호애의 정신이 강한 자”로 지목별 면적, 작부상황, 부업상황, 가축 사육두수, 부채 유무 및 부채액, 농가의 공과금, 성별·연령별 가족수, 동거인 수 및 농업에 종사할 수 있는 인원, 소작관행 등을 정밀하게 조사하여 선정하였다.
빈약한 자작농지설정사업은 실시 과정에서 더욱 초라해졌다. 1932-39년의 실적을 보면 18,991호가 설정되었고, 설정면적은 약 1만2천정보로 당초의 계획목표(연간 설정농가 2천호, 설정면적 1천정보)를 초과하여 총독부가 말하는 것처럼 '예기의 성과'를 달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설정농가를 설정면적 규모별로 보면 1936-41년간 설정농가의 62.2%가 '5단보 농가'에도 미치지 못하고, 더욱이 '3-4단보'와 '3단보 미만'의 영세규모 비중이 매년 크게 늘어났다. '3단보 미만'의 경우 1936년 6.9%에서 1941년에는 23.5%로 6년간 무려 3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또 설정농지도 논과 밭으로 구분해 보면 1932-39년 논의 설정은 계획면적 7,600정보의 78.0%인 약 5,900정보에 그친 반면에 밭 설정은 계획면적 1,900정보의 327.8%인 약 6,200정보나 되어 논과 밭의 설정을 4대1로 한다는 당초 계획과는 달리 설정이 밭에 집중되었다. 또한 설정대상 농지는 설정농가의 소작농지로 한다는 원칙도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였다.
자작농지설정사업이 당초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가운데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설정농가가 대부금을 제때에 갚지 못하고 연체하는 사태조차 일어나고 있었다. 1939년 당시 전체 연체농가는 4,089호로 대부자금 상환대상농가 16,542호(대부자금은 1년 거치 후 상환을 시작하므로 1938년까지의 설정농가)의 24.7%에 이르렀고 3년 이상 연체농가가 전체의 64%나 차지하였다.
자작농지설정사업이 1941년 끝나자 총독부는 소작농에게 농지를 소유하도록 하거나 또는 자작농에 대해 자작농지 경영을 지속시켜 사상 경제 모두 안정되고 견실한 자작농가의 창설 유지에 노력함으로써 농업 및 농가의 안정 발전을 꾀하여 전시하에 있어 농업생산력의 확충 강화를 목적으로 1942년부터 10년간 자작농창설유지계획을 실시하였다.
石塚峻,〈自作農地設定計劃に就て〉(朝鮮總督府《朝鮮總攬》1933)
朝鮮總督府農林局,《朝鮮農地年報》第一輯, 1940
友邦協會朝鮮史料硏究會,《朝鮮近代史料硏究集成》第3號, 1960
한국농촌경제연구원,《한국 농업·농촌 100년사》상, 농림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