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미곡창고계획
총독부는 미곡이 추수 후에 집중적으로 출하되어 미가가 하락하는 것을 방지하고, 일본의 쌀 이출을 계절적으로 조정하기 위해 1929년에 시험적으로 충남 강경에 250㎡, 전북 불이(不二)농촌에 100㎡, 전남 목포에 234㎡, 합계 584㎡의 농업창고를 설치하고, 위탁미에 대해 저리자금을 융통하여 평균판매를 장려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총독부는 같은 해 11월에는 11년 계획으로 200만석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농업창고건설계획안을 비롯하여 12월 농업창고·국립창고병치안(현미 2백만석 수용의 농업창고를 향후 11년간 건설하고, 현미150만석 수용의 국립창고를 2년간 건설)과 농업창고·상업창고병치안(1930년 현미 48만석 수용의 농업창고와 현미 120만석 수용의 상업창고를 6년간 건설하고, 다시 제2기계획으로 현미150만석의 농업창고를 9년간 추가 건설)을 차례로 입안하였다.
그런데 일본내각의 미곡조사회가 1930년 3월 조선총독부에서 대해 조선미통제를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내용을 일본 정부에 답신하자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농업창고건설계획을 수정하여 바로 조선미곡창고계획을 수립하였다.
미곡창고설치 계획 및 실적 (단위 : 평, %)
농업창고 | 조선미곡창고회사창고 | |||||
계 획 | 실 적 | % | 계 획 | 실 적 | % | |
1930 | 2,500 | 3,690 | 148 | 1,100 | 1,655 | 150 |
1931 | 2,500 | 2,779 | 111 | 1,000 | 1,629 | 163 |
1932 | 1,250 | 1,567 | 125 | 850 | 1,957 | 230 |
1933 | 1,750 | 1,786 | 102 | 850 | 2,026 | 238 |
1934 | 1,750 | 1,762 | 101 | 1,250 | - | - |
주: 조선미곡창고회사창고에는 차고평수(1930, 31년의 실적은 각각 10,711㎡, 8,900㎡)는 제외하였다. 연도는 회계연도.
자료: 朝鮮總督府農林局『朝鮮米穀要覽』1936.
朝鮮總督府農林局,《朝鮮米穀要覽》, 1936
朝鮮總督府農林局,《朝鮮ニ於ケル米穀統制ノ經過》, 1938
菱本長次,《朝鮮米の硏究》千倉書房, 1938
小早川九郞,《朝鮮農業發達史》朝鮮農會, 1944
石塚峻,《朝鮮における米穀政策の變遷》友邦協會, 1983
田剛秀,《植民地 朝鮮의 米穀政策에 관한 硏究 : 1930-45년을 중심으로》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3
한국농촌경제연구원,《한국 농업·농촌 100년사》상, 농림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