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경제가 철저하게 파괴되고 소작문제는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에 대해 재정도 부족하고, 문제 해결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도 없는 총독부는 공황으로 인한 농촌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농촌 통제를 강화하고, 또한 그것을 통해 식민지 통치질서의 위기를 조금이나마 완화시키려 하였다.
1930년대초에 발생한 농업공황으로 인해 농가 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지고 그와 더불어 농민운동과 소작쟁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식민지통치질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되자 총독부는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는데 농촌진흥운동(농산어촌진흥운동)도 그 중 하나였다.
농촌진흥운동은 1932년 6월 30일에 열린 도지사회의에서 우가끼 가쯔시게(宇垣一成) 총독이 농업, 농촌이 처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취지의 대강을 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10월 1일 「조선총독부농촌진흥위원회 규정」이 공포되어 정무총감을 위원장, 관련 국·과장을 위원으로 하는 조선총독부농촌진흥위원회가 설치되었고 농촌진흥운동 방침이 발표되었으며, 이와 함께 10월 1일자 도훈령으로 「농촌진흥위원회규정」이 발표되어 도농촌진흥위원회, 군농촌진흥위원회, 읍면농촌진흥위원회의 3단계 조직이 설치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준비 과정을 거친 총독부는 본격적인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하기 위해 1933년 3월 도지사에게 농가갱생계획수립방침과 농가경제갱생지도계획요강으로 구성된 〈농산어촌진흥계획실시에 관한 건〉을 통첩하였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농촌진흥운동의 ‘중추시설’ 인〈농촌갱생계획〉은 물심일여의 정신생활, 자급자족, 농가 노동력의 완전 소화(=자가노동력 착취)를 전면에 내세워 식량 충실, 금전경제 수지 균형, 부채 근절이라는 갱신 3 목표 달성을 제시하였는데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농촌갱생계획의 대상이 개별 농가라는 점이다. 처음에는 부락 단위의 지도를 통해 농가·농촌의 갱생을 이룬다는 방식이었으나, 1933년 3월 정무총감 통첩에서는 개별 농가별로 구체적인 지도를 실시하여 농가의 경제갱생을 꾀하는 방식이 크게 강조되었다. 계획 지도가 개별 농가를 대상으로 실시되었다는 점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실시된 농촌경제갱생운동과도 다른 점이다
농가갱생계획실시요강이 발표된 후 계획 수립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 먼저 농가현황조사가 실시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농가갱생계획〉이 수립되었는데, 계획은 갱생목표에 맞추어 〈부족식량충실계획〉, 〈현금수지균형계획〉, 〈부채근절계획〉, 그리고 〈생활개선계획〉의 네 부분으로 구성된 5개년 계획이었다〈농가갱생5년계획〉. 개별 농가의 농촌갱생계획 수립을 앞세워 본격적으로 실시된 농촌진흥운동은 빠른 속도로 전개되어 1934년말까지 총 4,695부락, 116,375호에 대해 〈농촌갱생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런데 총독부 내부에서는 〈농촌갱생계획〉을 전면적으로 확충하는 준비 작업이 총독의 지시에 따라 이미 1934년 10월경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1933년부터 시작된 〈농가갱생계획〉은 매년 1읍면 1부락씩 선정하여 실시되는데 이럴 경우 전국의 약 7만여 부락 전체에 대해 계획 수립이 완료되는데 30여년이나 걸리므로 총독부는 이것을 단축하기 위해 1935년부터 10년간 전 부락에 대해 농가갱생계획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총독부 내부의 검토를 거쳐 1935년 1월에 열린 임시 도지사회의에서 우가끼 총독은 농촌진흥운동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면서 ① 향후 약 10년간 물심 양면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고, ② 그 후 약 10년간 생활의 진전 충실을 기하며, ③ 그 후 약 10년간은 의무나 권리관계의 완전한 정비를 꾀하여 ‘민력의 충실, 민도의 향상, 자치의 확립을 기하여 명실 모두 내선평등,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충분한 지위를 향수하게 하여 통치의 대업을 완성’ 시키고 싶다는 장기적인 통치 방침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1935년부터 10년간에 걸쳐 기존의 지도부락 5,110부락(약 12만호) 이외에 전국의 총 69,700여부락(218만여호)에 대해 연차적으로 농가갱생계획을 수립, 실시하는 〈농가갱생10개년확충계획〉이 시작되었다.
총독부는 부락에서의 농촌진흥운동 실행을 위해 지도망을 구축하는 조치들을 실시하였는데 첫째, 농촌진흥운동을 농민들에게 직접 지도하고 실행하는 실행조합을 부락에 설치하였다. 일반적으로 농촌진흥회라고 불리우는 실행조합을 총독부가 이용한 것은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부락 질서(조직)를 활용하여 농민·농촌 조직화와 통제를 한층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둘째, 부락의 중견인물을 양성하였다. 총독부는 ‘농촌진흥운동을 번성하게 하고 그 효과를 현저하게 하며 실제적으로 하는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부락에 중심 선도로 될 사람」을 확보하는 것이고, 「특히 그 효과를 앞으로도 지속시키는데 있어서 먼저 중견이 될 청년의 양성을 꾀하는 것이 급무’ 라고 강조하면서 농촌진흥운동에 필요한 중견인물 양성을 지시하였다. 특히 1935년 〈농가갱생계획〉이 확충되면서 이에 대응하여 신속하게 중견인물을 양성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대책을 지시되었다. 이에 각 지방에 농사훈련소, 농도 강습소, 농촌청년훈련소 등과 같은 중견인물양성시설이 설치되었다. 총독부의 중견인물 양성 강화 방침에 따라 1933년 1개소, 1934년 4개소였던 중견인물양성소가 1935년 18개소, 1936년 17개소로 급증하였다.
농촌진흥운동은 1936년 8월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이 부임한 뒤에도 계속 실시되었는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시체제하에서 운동의 성격은 크게 변하여 개별농가의 생활 안정과 자력갱생 대신 생업보국이 운동의 전면에 나오게 되고 황국신민화 및 농촌 통제도 더욱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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