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확 품종의 재배로 쌀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고, 그로 인해 농가 소득도 이전에 비해 늘어났다. 또 다수확 품종의 개발, 보급을 통해 벼의 육종 기술, 재배기술, 지도보급기술도 크게 발달되었다. 그러나 지역조건이나 자연조건 등을 무시한 채 너무 성급하게 수확량 확대만을 목표로 해서 강제, 보급하였다는 점은 농정 추진에 있어 깊이 반성하여야 할 점이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만성적인 쌀 부족 현상에 처해 있었다. 때문에 정부는 1967년부터 실시한 혼·분식 권장시책을 1968년 2월 24일에는 음식판매업소에 대해 25% 혼식을 의무화하였고 또한 1969년 1월 23일부터는 매주 수, 토요일 11시부터 17시까지는 쌀을 원료로 한 음식 판매를 금지하였으며 1971년 11월 1일부터는 매주 수, 토요일 11시부터 17일까지는 쌀밥 판매를 금지하였다. 이와 같은 심각한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획기적인 다수확 품종 개발이 중요한 정책 과제로 대두되었다.
농업진흥청은 쌀의 다수확 품종을 개발하여 녹색 혁명을 이끈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IRRI)와 협력하여 다수성 신품종 IR667을 개발하고 1970년부터 시범재배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971년 초 재배 시험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새 품종의 이름을 ‘통일’로 결정하였다.
1971년에는 처음으로 통일계통 벼 수원 213호, 수원 213-1호, 수원 214호, 수원 215호 등 4계통이 전국 550개소의 농가포장(5ha 집단포장, 전국 총 2,750ha)에서 재배되어 평균 수확량 10a당 500.9kg이라는 좋은 성적을 올렸다. 이와 같은 결과를 바탕으로 1972년 전국 187,471ha에 통일벼가 재배되었는데 일부 증수한 농가도 있었으나 일부에서는 성숙기의 장기 강우와 저온으로 수확이 큰 피해를 입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를 놓고 여러 논란이 있었는데 1년 더 재배해 보고 결정하자는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1973년에 다시 전국적으로 재배가 실시되었다.
1973년 통일벼 재배면적은 1972년의 65% 수준인 121,200ha(전체 벼 재배면적의 10%)로 줄어들었는데 기상조건이 순조로워 10a당 481kg을 수확하였다. 일반품종의 수량이 350kg이었던 것에 비해 볼 때 대풍이었다. 이처럼 1973년 통일벼 재배가 커다란 성과를 올리자 1974년에는 ‘쌀 3,000만 석 생산 돌파’를 목표로 통일벼 보급이 추진되어 180,900ha에 통일벼가 재배되었다. 생산 독려를 위해 각도 농촌진흥원과 시군 농촌지도소에 상황실까지 설치, 운영된 이 해 통일벼 수량은 전년도보다 약간 감소한 10a당 473kg이 수확되었는데 재배면적 증가 등으로 전체 쌀 수확량은 총 3,087만 석이 생산되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쌀 생산량이 3,000만 석을 돌파하였다.
통일품종은 일반품종에 비해 수확량은 월등 많으나 밥맛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였다. 때문에 1975년부터는 미질이 개선된 신품종이 개발, 보급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품종이 유신(이리317호)이었다. 당국은 이 품종을 보다 빨리 보급시키기 위해 1974년 11월 원종을 필리핀에 보내 동계 증식 재배하였는데 필리핀에서 재배되던 이리317호 포장에서 흑조세균병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종자 국내 반입을 반대하는 의견이 강력하게 제기되었으나 지도기관에서 책임지도하는 것을 전제로 국내 반입, 보급되었다. 1975년 통일품종 재배면적은 274,100ha로 전체 벼 재배면적의 23%까지 확대되고 통일계 품종의 10a 당 수량이 503kg(일반품종 351kg)에 달하는 대풍을 이루었다.
1976년에는 통일품종 재배면적이 더욱 확대되어, 전년에 비해 95%나 늘어난 533,200ha로 전체 벼 재배면적의 45%에 달하였고, 10a당 479kg이 수확되었다. 특히 이 해에는 전국 10a당 쌀 생산량이 433kg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400kg대로 진입하여 총생산량이 3,621만 석을 기록하였다. 계속된 풍작은 1977년에도 이어져 무려 4,170만 석(10a당 494kg)이 생산되었다. 1973년에 3,000만 석을 돌파한 지 불과 4년 만에 4,000만 석을 돌파한 것이다. 특히 통일품종은 10a당 평균수량이 553kg을 기록하였으며 이와 같은 대풍년으로 1966년 8월 28일자로 금지된 100% 쌀 막걸리 제조가 1977년 12월 1일부터 허용되었다.
그러나 1978년부터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정부는 계속된 풍년에 힘입어 1978년에는 통일계 품종 재배면적을 929,000ha로 확대시켰는데(전체 벼 재배면적의 75.5%) 이삭도열병이 대규모로 발생하여 10a당 수확량이 474kg으로 전년에 비해 20kg이나 감소하였다.
1979년에는 전년도의 이삭도열병 피해 때문에 통일계 품종 재배면적이 744,100ha로 20% 감소되었는데 이 해에는 심한 태풍 피해로 10a당 453kg으로 줄었고, 통일계 품종과 일반계 품종간의 수확량 차이도 점점 줄어들었다.병충해와 재해로 2년 연속 생산이 타격을 받자 1980년 통일계 품종 재배면적은 604,200ha로 또 다시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 해에는 냉해로 큰 피해를 입어 10a당 평균 수량이 289kg으로 지난 해보다 무려 166kg이나 감소하였고 더욱이 통일게 품종은 287kg으로 일반계 품종 평균 수확량 292kg에 비해 5kg이 적었다. 이처럼 통일계 품종이 피해를 자주 받고 수확량이 크게 줄어들자 농민들 사이에서 통일계 품종에 대하 불신이 커지고 있었다.
이처럼 상황이 변하자 정부도 냉해를 고려한 품종 안배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냉해 대책을 위한 재배기술 정립과 내랭성이 약한 통일계 품종 위주에서 내랭성이 강한 일반계 다수확품종으로의 전환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통일계 품종 쌀의 재고가 증가하여 국가재정도 부담을 받게 되자 정부는 결국 1990년 통일형 품종을 장려품종에서, 그리고 1992년부터는 정책 수매에서도 제외시켰다.
농림수산부,《韓國糧政史》농림수산부, 1978
허문회,〈통일벼 품종 개발〉한국농촌경제연구원《농정반세기 증언》농림부, 1999
전세창,〈다수확 신품종 보급〉한국농촌경제연구원《농정반세기 증언》농림부,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