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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림해양수산

농지개혁사업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신한공사 해체〉(1948.3.22)
〈중앙토지행정처의 설치〉(1948.3.22)
「제헌헌법」(1948.7.17)
「농지개혁법」(1949.6.21)
「귀속농지특별조치법」(1951.4.15)
「농지개혁사업특별회계법」(1952.4.12)
「농지개혁사업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1968.3.13)

역사적 의의

농지분배가 완료된 1951년 말에 소작지는 158천정보로서 전체 농지면적 1,958천 정보의 8.1%로 줄었다. 농지개혁을 계기로 하여 식민지지주제가 해체되고 자작농체제가 확립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농업·농촌은 노동력과 자본의 공급을 통해 한국자본주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배경

농지개혁이란 지주가 소유하던 농지를 그 소작인에게 양도하도록 함으로써 농지의 소유관계를 구조적으로 개혁하는 조치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북한이 1946년 3월에 사회주의적 토지개혁을 실시한 데 이어 남한은 1948년 3월과 1950년 4월 등 2차에 걸쳐 농지개혁을 실시하여 1968년 5월 「농지개혁사업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사업을 완료하였다.


그 실시 배경으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 배경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점령국의 토지개혁을 반공 전략의 핵심으로 일관되게 추진하였으며, 1946년 3월 북한이 사회주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자 남한의 농지개혁을 적극 추진하였다. 또한 당시 남한의 정당·사회단체들도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농지개혁을 주장하였다. 


둘째는 사회·경제적 배경으로서 1945년 해방 당시 전농가의 86%가 소작농, 전농지의 64%가 소작지인 상태에서 농업생산력과 농가경제의 향상을 위해서는 지주적 토지소유의 해체가 긴요하였다. 나아가 산업 발전을 위해서도 지주 및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다.

내용

〈제1차 농지개혁〉은 미군정에 의해 실시되었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5일 소작료의 상한을 연 수확량의 1/3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 데 이어 12월에는 조선 내 모든 일본인 소유 재산을 미 군정청 소유로 귀속시켜 신한공사로 하여금 관리토록 하였다. 이어 미군정은 1946년 2월 27일자로 토지개혁법안 기초위원회를 구성하여 초안을 작성한 다음 1947년 초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회부하였다. 이 법안은 산업노농위원회의 수정을 거쳐 1947년 12월 본회의에 상정되었으나 정원미달로 본회의가 유회된 데 이어 1948년 3월 입법의원이 해체됨으로써 자동 소멸되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1948년 3월 22일 과정법령 173호와 174호로써 중앙토지행정처를 설치하여 신한공사를 해체하고 귀속농지를 그 소작인들에게 매각하였다.


농가 호당 2정보를 상한으로 연간 생산량의 3배에 해당되는 지가를 현물로써 매년 20%씩 15년간 상환하는 조건이었다. 이리하여 신한공사가 관리하던 귀속농지 중 1948년 4월에 논 154,050정보(총 매각면적의 76%)와 밭 44,979정보(69.1%) 합계 199,029정보(74.3%)가 매각되고, 나머지 논 48,643정보와 밭 20,104정보 합계 68,747정보는 한국정부에 이관되어 1951년 「농지개혁법」에 의해 대부분 분배되었다. 


〈제2차 농지개혁〉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농지개혁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헌법」 제86조는 법률에 의해 농지를 분배한다고 명시하였다. 정부는 1948년 9월 7일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를 구성하여 작성한 초안을 11월에 발표하고 1949년 1월에 그 수정안을 정부안으로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국회는 별도로 작성한 산업위원회안을 1949년 1월 26일 국회안으로 확정하여 1949년 3월 10일 본회의에 상정하고 정부안은 폐기하였다. 이리하여 1949년 4월 27일 「농지개혁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정부에 이송되었으나 정부는 보상액 15할과 상환액 12.5할의 차액을 보조하기 위한 재정 미확보 등의 이유를 들어 5월 16일 「농지개혁법」의 소멸을 통고하였다. 


이에 대해 국회는 다시 정부에 이송할 것을 의결함으로써 결국 정부는 6월 21일자로 「농지개혁법」을 공포하는 한편, 7월 7일자로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이리하여 개정된 「농지개혁법」이 1950년 2월 2일 통과되어 3월 10일 공포된 데 이어 4월에 농지분배가 이루어져 6월 9일 제1차 연도 상환액 하곡 수납에 착수하였으나 6월 25일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0월 19일 사업이 재개되어 1951년 3월 5일 농지분배가 완료된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어 1951년 4월 「귀속농지특별조치법」에 의해 1948년 4월에 매각된 귀속농지의 지가도 「농지개혁법」에 의한 분배농지의 상환액과 동일하게 되었다. 분배면적 상한은 농가호당 3정보, 상환조건은 연 수확량의 150%에 해당되는 지가를 매년 30%씩 5년간 균분 상환하는 조건이었다. 


농지개혁에 의해 분배된 면적은 논 215,266정보와 밭 101,595정보 합계 316,862정보이었으며, 귀속농지 매각면적은 논 202,693정보와 밭 65,083정보 합계 267,776정보였다. 제1차 및 2차 농지개혁을 통해 논 417,959정보와 밭 166,678정보 합계 584,638정보가 분배되었던 것이다. 이 면적은 1945년 말의 소작지 면적 1,447천 정보(귀속농지 273천 정보와 일반농지 1,174천 정보)의 40.4%에 해당된다. 귀속농지는 모두 매각·분배된 반면 일반농지의 소작지 중 714천 정보(소작지 총면적 1,447천 정보의 49.2%)가 농지개혁이 지연되는 동안 지주에 의해 처분되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김성호 외, 《농지개혁사연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박석두,〈대한민국 수립과 농지개혁〉-《쟁점 한국근현대사》한국근대사연구소, 1993.10
유인호,〈해방후 농지개혁의 전개 과정과 성격〉-《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76
장상환,〈농지개혁 과정에 관한 실증적 연구-충남 서산군 근흥면의 실태조사를 중심으로〉연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사학위논문, 1985
정영일,〈전후 한국농지개혁에 관한 일고찰〉-《경제논집 제6권 2호》 서울대 경제연구소, 1967
황한식,〈미 군정하 농업과 토지개혁정책〉-《해방전후사의 인식2》한길사, 1985

집필자
박석두(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