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미군정청은 조선의 교육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조선인 지식인으로 구성된 심의기구를 활용하였지만, 미국 교육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해방 직후의 교육원조는 이러한 배경에서 미국교육전문가의 한국교육실태조사와 미국교사의 교수법 연수 지원을 목적으로 교육원조 계획을 수립하였다.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 이후 파괴된 교육시설 복구와 교사인력 양성 그리고 고등교육의 활성화를 위한 교육원조가 진행되었다. 교육원조 당시 교육재정은 초등교육의 60% 정도, 중등교육의 20% 정도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부족한 재원은 사친회비를 통해서 보충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교육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팽창하여 학교 신설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였고, 여기에 한국전쟁으로 인한 학교 시설의 파괴는 교육재정에 상당한 압박이 되었다. 또한 해방 이후 몇 차례 교사 연수가 실시되었지만, 교사의 수급을 맞추기에도 어려웠고, 새로운 민주주의 교수법에 대한 이해도 낮았다. 이로 인해 교사 재교육의 문제 또한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사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원조는 UNESCO와 미국측의 조사와 지원이 바탕이 되고, 한국 정부의 요구가 반영되면서 1950년대에의 교육재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45년 10월에 미군정청은 ‘미국교육원조추진심의회’를 구성하여 조선인도미교육사절단(Korean Educational Commission)을 결성하였다. 조선인도미교육사절단은 1946년 봄부터 4개월 동안 미국을 순방하면서 한국교육재건에 관한 미교육국 의견서를 작성하였고, 이에 따라 미국의 교육전문가에 의한 한국교육실태 조사를 비롯한 장단기계획이 수립되었다.
본격적인 교육원조는 1950년 이후 시작되었다. 1952년 초에 UNESCO 대표가 내한하여 한국의 교육상황을 조사한 후 교육원조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1952년 9월부터 UNESCO-UNKRA 교육계획사절단이 교육원조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 의해 1953년부터 1957년까지 1,100만 달러 규모의 UNKRA 교육원조가 이루어졌다. 이 자금은 대부분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학교시설을 복구하는 비용으로 충당되었다. FOA/ICA 교육원조는 미국이 주도하여 1954년부터 1961년까지 2,200만 달러의 규모로 지원되었다. 이 재원은 주로 고등교육의 발전과 교사양성교육 강화 부분에 사용되었고, 또한 교육시설 복구 및 교육용품 구입에도 사용되었다.
1950년대의 교육원조는 UNESCO가 주도하는 UNKRA 교육원조와 미국이 주도하는 FOA/ICA 교육원조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교육원조의 방식은 원조기구의 달러와 한국정부의 대충자금으로 구성되었고, 전후 한국교육을 재건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UNKRA 교육원조는 90%의 자금이 학교시설을 복구하는 시설 원조에 사용되었고, FOA/ICA 교육원조는 시설 원조에 40%, 기술 원조에 60% 정도가 사용되었다. 이 중 기술원조는 주로 고등교육, 특히 서울대학에 대한 지원과 교사 재교육에 대한 지원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FOA/ICA 교육원조에 의한 기술 원조 과정에서 미국의 피바디 대학, 미네소타 대학, 워싱톤 대학 등의 교육관계자가 많은 영향을 미쳤고, 특히 중앙교육연구소를 설립하는 데에도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전후 한국의 교육을 재건하는 데에 미국의 교육학과 미국식 교육 방법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교육원조는 해방 이후 한국교육에 양적, 질적 측면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원조금이 교육시설의 신설과 복구, 교육용품의 구입에 지원됨으로써 급증하는 교육수요에 대처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미국 교육전문가에 의한 한국교육 실태조사, 교수법 및 교육이론 연수 등이 이루어져 교육의 과학화와 민주화에도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육원조가 주로 미국의 영향 하에 이루어짐으로써 해방 이후 한국교육을 재건하는 선택지가 좁아졌다는 비판도 있다.
문교부, 『문교개관 : 4291年』, 1958
중앙대학교, 『文敎史 : 1945-1973』, 중앙대학교출판국,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