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은 1994년 6월 중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의 핵 합의 이후 7월 말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7월 8일 갑자기 사망했다. 김일성 사후 북한의 권력은 자연스럽게 후계자인 김정일에게로 승계되었고, 이후 북한은 김정일에 의해 통치되었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권력세습이 김일성 사후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권력세습의 사전작업이 미약했다면, 김일성 사후 김정일의 권력승계나 정권의 유지가 커다란 난관에 부딪쳤을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김정일이 커다란 어려움 없이 북한의 리더십을 승계했다는 점은 북한사회의 통제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왔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김일성 사후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에 관한 예측이나 루머가 난무했지만, 실제로 확인되지는 않았고, 권력세습은 상당히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김정일에로의 권력세습과정은 이미 1970년대 초반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 혁명 소조운동 등 북한의 대중운동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비서국 비서 및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80년대에 들어서는 ‘친애하는 지도자’로 호칭됨으로써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굳어졌으며 북한사회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 김정일은 무력에 대한 지휘통솔권을 지닌 국방위원회를 장악하게 되는데, 1990년 5월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오른 후, 1993년 4월에 마침내 국방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김일성 사후 3년 후인 1997년 10월에 김정일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로 선출되어 권력승계를 마무리하게 된다. 원래 김정일이 국가주석직까지 승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국가주석은 김일성이 유일하다며 국가주석에 오르는 대신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명명하고 주석직을 실질적으로 폐지하였다. 대신 북한의 최고 군사지도기관으로 국방위원회의 위상을 높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실질적인 국가원수로서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이는 1998년 9월에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추대되었다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북한 헌법상으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를 대표하기 때문에 형식상 북한의 국가 원수는 한국의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될 것이나, 실질적으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국가원수이다. 따라서〈2000년 남북정상회담〉도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북한내부에서는 김정일의 권력이 오랫동안 상당히 성장해서 실질적으로는 1990년대 초반부터 김일성과 김정일 사이에 일정한 분업체제가 작동하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일성은 대외정책과 남북한 관계를 책임지고 있었고, 김정일은 국내정치에 집중함으로써,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자연스러운 권력이양과 김정일의 국내적 권력기반이 공고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역시 김정일이 북한의 내부문제를 총지휘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이처럼 실질적인 권력승계는 오랜 시간동안 진행되어 왔지만,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는 것은 김일성 사후 3년이 지난 1998년이었다. 이러한 과정은 김정일의 리더십이 상당부분 김일성의 리더십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국가주석직을 폐지하여 김일성을 영원한 국가주석으로 존재시킴으로써 김일성의 유훈에 의해 북한사회가 통치된다는 소위 유훈통치는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1994년 6월의 카터-김일성 핵 합의 이후 북미관계는 전반적으로 개선되었으나, 김일성 사망이후 남한에서는 김일성 주석의 조문을 둘러싸고 이른바 ‘조문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고, 이와 더불어 북한 핵 문제에 대한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책으로 남북관계가 크게 경색되기도 하였다.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 《두개의 한국》 길산, 2003
Leon V. Sigal, 《Disarming Strangers: Nuclear Diplomacy with North Korea》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
황장엽, 《나는 역사의 진실을 보았다》 한울,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