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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안보국방과 북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내용
                                                                                      

북한은 1966년경부터 남한에 대한 군사도발 및 게릴라침투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추세는 1968년 초에 극에 달하였는데, 1·21 사태와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은 그 좋은 예이다. 이듬해인 1969년에도 북한은 미국의 EC-121기를 격추하는 등 군사적 도발행위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대응하여 한국정부는 미국의 지속적인 안보공약을 확인하는 한편 향토예비군 제도를 도입하고 국방현대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69년 이후 북한의 대남전략은 점차 이전의 군사모험주의적 노선에서 벗어나 보다 유화적인 것으로 변모하였다. 이는 주로 선전적인 차원에서 대남혁명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는 이후 1970년대 초에 전개된 남북대화의 한반도 차원에서의 배경을 이루었다.

 

1970년대 초반 북한은 남한과의 대화를 시도하다가 김대중 납치를 기점으로 대화중단을 선언하였다. 북한은 남한의 유신체제를 비난하면서 통일논의를 주도하려고 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판문점에서 미루나무를 제거하려던 미군을 북한 병사들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 대응하여 미국은 항공모함을 파견하는 등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북한이 사건에 대한 유감을 포명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한편 미국 카터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주한미군철수를 둘러싼 한미간, 그리고 미 행정부 내에서의 논의가 다시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결국 북한의 군사력 수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카터행정부는 주한미군철수정책을 철회하였다.

 

안보의 상당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던 한국은 미국의 지원이 절실하였다. 전두환 정부는 미국과의 동맹관계 정상화를 위한 대미외교를 강화하는 한편, 남북한 관계의 개선과 통일문제를 총체적으로 협의, 해결하고자 하였다.

 

1980년 재개된 남북대화는 서로 상대방을 불신하는 가운데서도 해가 거듭될수록 점진적으로 개선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리하여 북한은 19841월 남한의 현 정부와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종래의 태도를 바꾸어 미국을 포함한 남북한 간의 3자회담 개최를 주장하고, 330일에는 남북한 간의 체육회담을 제의하였다. 비록 무산되었지만 남북한 체육회담은 3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19841115일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남북 경제회담이 열려, 1984-19855차례 계속되었다. 이 시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 적십자회담도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적십자 총재를 단장으로 하는 151명 규모의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 공연단의 남북한 교환 방문이 성사되었다.

 

김영삼 정부시기 북한에 발생한 중요한 변화는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북한의 핵심 권력부에서 활동하던 황장엽의 망명이다. 김일성은 19946월 중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의 핵 합의 이후 7월 말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78일 갑자기 사망했는데, 김일성 사후 북한의 권력은 자연스럽게 후계자인 김정일에게로 승계되었다. 또한 북한 권력의 핵심에서 활동하던 황장엽이 1997212일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망명하였는데, 김일성과 김정일의 최측근 인사였으며, 북한 주체사상의 주요 설계자로 알려져 있던 황장엽이 북한을 탈출함으로써 북한 사회의 안정성과 내부 정보에 대한 많은 의혹과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러한 북한 사회의 변화는 한반도의 안보와 국방 분야에 있어서 김영삼 정부에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에 대해 북한은 이산가족 방문단 상호교환, 남북경제협력, 남북정상회담6.15남북 공동선언, 대서방 관계 개선 등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그와 동시에 동해안 잠수정 침투, 무장공비 침투, 서해안 간첩선 침투, 남해안 반잠수정 침투, 2회의 서해 북방한계선 침범 (1999, 2002) 등 지속적으로 대남도발을 감행하여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을 조성하였다. 이는 남북 화해분위기와 적극적인 외교활동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대남 적화정책을 포기했다거나 대외 개방정책으로 완전히 전환했다고 보기는 이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북한의 도발에 군사적으로 단호하게 대처하여 대북 안보의지를 과시하고 더 이상 긴장을 고조시키지 않는 가운데에 북한이 화해협력정책에 호응할 것을 종용하였다.

참고자료
서울대학교 미국학연구소 편, <한미관계, 1882-1982>

돈 오버도퍼, <두개의 한국>

실록 제5공화국 (1), 경향신문사, 1987.

한국외교 40, 외무부, 1990.

김정원, 한국외교발전론, 집문당, 1996.

외교통상부, 한국외교 50, 외교통상부, 1999.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 두개의 한국, 길산, 2003.

외무부, 외교백서, 1993-1997.

외교통상부, 외교백서, 19982002.

국방부, 국방백서, 2000.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 마상윤(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 / 전상숙(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17. 12. 26
최초 주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