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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8240부대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북한 전선 후방지역의 아군 유격대에 대한 통제는 처음 미 제8군에서 담당했으나 극동군사령부로 이관되면서, 1951년 7월 26일 미 극동군사령부 연락처, 제8240부대를 창설했고, 주한연락처는 극동군사령부 연락처의 통제를 받았다.
배경
미군 당국이 유격대 활동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한국 해군이 서해안 도서에서 공산군에 대항하는 유격대 활동을 알리고, 탄약지원을 요청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51년 1월 8일 한국 해군 95.7기동전대장은 해주와 사리원 등 황해도 서쪽으로 후퇴해 온 약 1만 명의 의용군이 무장하고 있다면서 이들에게 일제와 소련제 무기의 탄약 보급이 가능한 지를 미 제8군사령관에게 문의해 왔다. 이 무렵 미군은 동부지역에도 원산과 전선 사이에 소규모의 유격대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미 제8군사령부는 탄약을 공급해 줄 수 있다고 회신하면서 정보참모부에게 의용군 지도자를 확인하여 그들의 능력이나 활용방안을 검토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미 극동군사령부는 제8군으로 하여금 반공유격대에 관심을 갖고 게릴라부대를 편성해 작전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황해도지역 의용군은 초도와 백령도를 중심으로 약 6천여 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내용

1951년 1월 중순 미 극동군사령부는 맥기 대령에게 게릴라부대의 편성, 지원 통제권을 승인하였다. 맥기 대령은 극동군사령부로부터 해군과 공군 지원을 승인받아 유격대원의 지원을 위한 무기와 탄약은 미 제8군으로부터, 통신과 기동력은 미 해군과 한국 해군으로부터, 유격대원들의 식량은 유엔 민간원조위원회로부터 확보하여 지원체제를 갖추었다. 이로써 미군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민간인 유격대가 조직되었다. 


1951년 12월 10일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와 기타 업무단이 통합되어 유격대의 작전통제권이 극동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로 이관되었다. 1952년 9월 하순 유격대 증강이 계획되면서 주한연합정찰사령부는 제8242부대로 개칭되고 극동군사령부 연락단에서 예속이 해제되면서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의 작전통제권을 인수하였다. 여전히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 제8240부대로 널리 불려졌다. 1952년 11월 연락파격대의 유격부대를 주한유엔군 유격부대로 명명했다. 


1953년 6월 연합정찰사령부 제8242부대의 간부진은 사령관 스튜어트 준장, 부사령관 길보 공군대령, 참모장 스타인백 대령, 부관 에반스, 정부참모 벤코스키 등이었다. 이러한 편성으로 전쟁중 계속 운영하다가 휴전 무렵부터 유엔군 유격부대 개편안이 논의되면서 1953년 국방부 제8250부대로 재편되었다. 이후 1953년 9월에는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 예하 유격과가 독립단위부대로서 주한 유엔군 유격부대로 개편되어 유격대를 전적으로 통제 및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중순 미 제8군 맥기 대령은 미군은 물론 한국 육군, 해군 등으로 연합사령부의 설치를 제안했다. 초기 작전계획에 의하면, 각 지지에 한국군 해군 경비병 100명 외에 한국군으로 해군 지휘관, 유격기지 지휘관, 참모장교 및 사병 등을 편성할 예정이었으나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다만 국군과 유엔군과 합동작전의 긴밀한 상호연락을 위해 미 극동주한연락처 파견단 본부에는 한국군 육군 파견장교단이 있었다. 장교단은 계인주 대령이 첩보업무를 맡았고 유격사단 부사단장으로 이영순 대령이 임명되었고, 그 외 오봉규, 이창복, 선우진, 이신근 소령등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격대원의 인사, 작전권을 비롯해 보고계통에서 소외되어 거의 통역장교 수준정도에 불과하였다. 


1951년 2월경 미 제8군은 작전참모부 예하 지구전과 책임아래 첩보수집, 침투계획, 대원모집, 훈련, 지원 등을 수행할 작전수준급 부대인 작전기지사령부로 백령도에 윌리암 에이블기지와 부산근교에 공수훈련 및 특수임무를 담당하는 베이커지지를 창설하였다. 1951년 3월 윌리암 에이블기지가 레오파드가지로 이름이 바뀌면서 산하 유격부대는 건제순으로 동키부대에 숫자를 부여하였다. 레오파드기지의 작전지역은 북쪽으로 평안북도 연안도서인 신미도와 대화도로부터, 남으로는 옹진군 흥미반도의 등산곶까지였다. 그 후 서해안에서 올팩부대가 추가로 창설되었다.


1951년 중반이후 서해안지역에서 유격대가 계속 증가하자, 유격작전 지역을 2개의 독립지역 사령부로 분할하였다. 즉 옹진반도 등산곶을 기점으로 레오파드기지사령부는 옹진반도의 서부 및 서북부지역을, 울팩기지사령부는 옹진반도의 동쪽과 남쪽으로 한강어귀와 인천 팡바다의 도서를 관할했다. 이 때문에 울팩기지사령부를 남사령부, 동키사령부를 북사령부라고 부르기도 했다. 백령도 레오파드기지사령부는 예하에 20여개에 이르는 유격대를 두었다. 


1951년 12월 백령도 레오파드기지의 작전지역이 넓어서 부대사령부에서는 그 임무를 분담시키기 위해 강화도에 울팩기지를 설치하였다. 울팩기지의 모체는 교동도에 지구사령부를 두고 강화도로부터 연평도 서쪽까지 담당했던 페리 특수임무부대였다. 울팩작전기지 산하에 10여개의 유격대가 있었으나 주요 부대는 8개 부여였다. 


유격대 창설초기 각 기지사령부 예하 유격대는 일련의 연대급 부대로 편성되었다. 기지사령부가 연대 단위로 재편되었기 때문에 부대로 통일하였다. 부대 규모는 부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적을 기만하기 위해 과장되게 편제했으나 규모가 있는 부대의 경우 대대병력 수준 정도였다. 각 유격대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무장치안대의 조직을 기반으로 편성되었다. 부대수가 많은 이유는 동향인끼리 편제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1952년 11월 미군사령부의 승인하에 각 부대 단위별로 효과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전체 조직을 강화하고 부대 간의 갈등을 조절하고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동키부대의 각 부대장들이 공동으로 서해지구 합동참모부를 창설했다. 유격대원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북한지역에서 피난 온 반공청년 6천 ∼ 1만여 명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현지 주민과 남한출신들도 상당수 모집되었다. 유격대원들이 의무적인 군대복무를 위해 징병되거나 고용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대원들의 입대배경은 다양했다. 유격대의 규모는 통상 5천∼6천여명 수준이었으나 1952년 9월에 이르러 8천여 명에 이르렀고, 1953년 5월 2만 2천여 명으로 최고조에 달하였다.

참고자료

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 유격전사》서울인쇄, 2003.
육군본부 《한국전쟁과 유격전》육군인쇄, 1988.
연백군민회 《연백군지》연백군지편찬위원회, 1986.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신오성, 1995.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18. 07. 17
최초 주제 수정
2008. 0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