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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정부의 휴전반대

주제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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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원인

한국 정부는 최초 협상이 제기될 때부터 휴전 협상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해왔으며, 한국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휴전협정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엔군은 공산군과의 휴전 협상을 마무리 할 무렵 한국정부와의 관계는 도리어 악화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통일에 대한 강한 열망이나 북한의 남침에 의한 막대한 피해 사실, 중국과 소련의 군사력 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장차 다시 북한으로부터 침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 등 때문이었다.

내용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장군은 한국의 이러한 반대는 협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판단하고, 워싱턴으로 “상황은 절박하나 이대통령은 ‘미국이 전후 경제 원조를 제공할 것이며 평화적 방법에 의한 한국통일을 계속 추진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한 ·미 상호방위조약을 보장한다 ’면 무마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평가서를 제출하였다.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만일 “유엔군사령부가 중공군이 압록강 이남에 잔류하는 것을 허용하는데 동의한다면,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에서 철수시킬 것 ”이라고 통보하였고, 또 “만일 싸워야 한다면 단독으로도 싸울 것 ”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군사령관 클라크장군이 이대통령을 방문하였다. 이 회의에서 주요 문제는 유엔군과 중공군의 동시 철군이었다. 이대통령은 이 회의에서 상호방위조약체결과 소련이 침략할 경우 미국의 원조 보장, 그리고 평화가 확보될 때까지 해군의 봉쇄와 공중 방어의 계속 및 국군의 증강 등을 요구하였다.


이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하는 견해에는 변함이 없으며, 포로관리 차원에서 인도군이 한국 내에 입국한다면 내 명령으로 송환거부 포로들을 석방하겠다 ”는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1953년 5월 미국은 휴전을 앞당기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다. 클라크장군은 이대통령에게 적에게 제안할 송환거부 포로에 관한 유엔군의 최종안을 설명하였다. 그는 이대통령에게 휴전에 협력할 경우 정치·경제·군사적 지원을 보장해 주겠다고 설득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협력하겠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다고 반발하였다. 유엔군의 최종안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을 경악케 하였으며 심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우선 휴전회담 한국 대표가 회담 참석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을 번복시키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국과 미국 정부와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성명을 발표한 날, 유엔군사령관은 미대통령의 상호방위조약 교섭 용의와 경제 지원을 약속하는 서한을 전달하였다. 이 대통령은 이미 미국을 압박할 몇 가지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1953년 6월 8일 한국 국민의 기대에는 아랑곳없이 포로송환협정이 조인되자 한국민들의 휴전 반대운동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 대통령은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한을 가지고 내한한 로버트슨에게 한국의 입장을 전달하였고 몇 차례의 토의 끝에 휴전에 합의하였다. 


그동안 이 대통령은 분단 극복을 위한 민족국가 완결에 그 목표를 두고 휴전에 반대하였으며, 강대국이 한반도를 미해결의 장으로 남겨 놓게 되면 한민족이 계속해서 고통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참고자료

송효순 <<대석방>> 신현실사, 1973.
한표욱 <<한미외교요람기>> 중앙일보사, 1984.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휴전사>> 서라벌, 1989.
양대현 <<휴전회담 비사>> 형성출판사, 1993.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