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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안해저유물도굴단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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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유형 사건/사고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원인

신안해저유물을 둘러싼 도굴은 1970년대 초중반부터 1984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건 확인되고 있다. 도굴범들 중 일부는 유물을 자진신고·반납하여 처벌을 면제 받은 경우가 있고, 이를 밀반출하여 강한 처벌을 받은 경우도 있다. 신안해저유물의 도굴과 관련하여 300여 명이 연루될 정도로 크고 작은 사건이 연속되었다. 이하에서는 해양경찰이 수사한 사건 1건만 소개하기로 한다.


해양경찰은 1985년 6월 13일 전남 신안군 증도 일원 해상에서 해저 유물을 도굴, 서울 등지로 밀반출한 일당 14명 중 총책 김00(43세, 어부) 등 9명을 검거하였다. 이들은 동년 4월 5일부터 김씨 소유의 어선 경진호(7톤)에 잠수부 2명을 동원, 청자접시·화병 등 문화재 60여점을 도굴하였다. 해경은 이들을 검거하면서 문화재 58점을 회수하였다.


1976년 1월 어느 날 전남 신안군 지도면 도덕도 앞 해상, 트롤 어선으로 고기를 잡던 어부의 그물에 갯벌의 흙과 굴 껍데기가 다닥다닥 붙은 항아리가 걸려 나왔다. 집에 가져와 잘 씻어 놓고 보니 청자였다. 어부는 청자를 군청에 신고했고, 이후 신안 앞바다에는 보물선이 가라앉아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재빠른 도굴범들은 바다에서 도자기들을 건져 올려 일본에 몰래 팔았다. 9월에야 낌새를 챈 경찰이 도굴범들을 붙잡아 보니 그들의 창고에서 국보급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문화재관리국은 그해 10월 11일에 ‘신안해저유물 발굴조사단’을 구성해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했다.

내용

1. 시기

* 도굴범 수사: 1976년부터 1985년까지의 10년간.

* 발굴: 1976년부터 1984년까지의 9년간 11차 발굴.


2. 사건전개

가.발견과 발굴계획

예로부터 도덕도 앞바다에서는 거물에 도자기가 심심찮게 걸려 나왔다. 그러나 어부들은 재수 없는 것이라며 다시 바다에 던져버리곤 했다. “옛날 고려장을 지낼 때 사람을 수장하면서 사용했던 그릇들이다”라는 속설이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1975년 5월 방축리에 사는 어부 최00의 그물에 항아리 몇 점이 걸려들었다. 청자와 백자들이었다. 최00의 동생 최00는 예사롭지 않은 물건 같아서 이 도자기들을 들고 신안군청을 찾았다. 감정결과 형이 건진 항아리 중 하나가 청자대형화병으로 판명됐다.


1976년 10월 16일 문화재위원회는 이 지역 반경 2㎞ 정도를 문화재보호구역으로 가지정(假指定)하고, 10월 16일부터 1차 조사 작업에 착수했다. 그 후 9년 동안 문화재관리국 주관 아래 11차에 걸친 발굴이 진행되었다.


나. 도굴범들의 도굴
최씨 형제가 도자기를 신고해 100만원을 받았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돈이 되는 곳에 범죄가 있듯이 어김없이 전문도굴꾼들이 등장했다. 방축리 주민 조모(당시 50세)씨 등 일당은 ‘정우호’'란 3t급 똑딱선을 12만원을 주고 빌렸다. 잠수부로는 정모(당시 33세)씨가 가담했다. 특별히 밤을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백주대낮에 이뤄진 도굴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 당시에는 문화재관리국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1976년 9월 1일 낮부터 3일까지 1단계 작업에서 백색사발 7점, 청색사발 3점, 접시 12개 등을 건져냈다. 이후 그 달 21일까지 4차례에 걸친 작업 끝에 꽃병항아리·향초접시 등 유물 117점을 인양했다. 이들은 유물들을 한 점에 200만-300만원씩 받고 목포와 전주 등지에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위 사건은 신안유물을 둘러싼 수많은 도굴사건의 신호탄이 되었다. 신안유물이 전국적 유명세를 탄 것은 역설적이지만 이들의 범행 때문이었다. 이들은 그해 10월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어부 조씨와 잠수부 정씨 등 11명이 수사망에 걸린 것이다.


바다에서의 도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신안유물은 비로소 세간의 관심권으로 떠오른다. 문화재관리국의 발굴조사단이 꾸려진 것도 이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신안해저유물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 받을수록 도굴조직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발굴과 도굴간의 지리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유물감시를 맡은 감시원들이 도굴에 관여하기도 하고, 인근의 지역주민들이 잠수부를 동원하여 도굴해 가기도 했다. 공무원이 낀 도굴사건도 유명하다. 1978년 7월 치안본부 특수수사대는 신안군청 산업과장 최모(당시 40세)씨가포함된 대규모 도굴단을 적발했다. 최씨와 정씨 등 도굴단은 여수·부산에서 UDT출신 잠수부들을 끌어들었다. 일당은 두 차례에 걸쳐 모두 200점 도굴하는 데 성공했다.


1987년 2월 서울지검이 1천여 점의 유물을 해외로 밀반출하려던 일본인 1명 등 7개 파 17명을 구속한 뒤 도굴은 표면상 잠잠해졌다. 그러나 일본 도쿄 등 대도시의 골동품상에서는 1990년대 중반까지도 ‘신안해저 출토유물’이라며 공개적으로 팔아왔다고 한다. 도굴된 유물의 규모가 정식 발굴된 수치와 맞먹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온 것도 이러한 연유이다. 최초의 도굴사건을 시작으로 10여 년 동안 줄잡아 300여명의 도굴꾼과 밀매범들이 적발됐다.


다. 발굴 작업의 전개
유물발굴단의 1차 조사는 1976년 10월 26일부터 11월 2일까지, 2차 조사는 11월 9일부터 12월 1일까지 진행됐다. 두 차례의 발굴을 통해 해저유물의 존재가 명확하게 확인됐다. 그와 동시에 1,800점의 도자기와 6,000점이 넘는 동전이 쏟아져 나왔다. 1·2차 조사의 발굴단은 조명기 서울대교수를 단장으로 한 발굴조사위원 6명, 실무위원 8명, 해저조사위원 10명, 행정요원 3명 등 30여명으로 구성됐다. 국방부에서는 해군 51전대 소속 심해잠수사들을 파견했다.


문화재연구소 민속예능실장으로 1차 조사 때부터 참여했던 이호관(전 전주박물관장)씨는 “첫 발굴 때 당시로서는 최신장비를 갖춘 해군 심해잠수사들도 유물 위치를 제대로 못 찾았다. 고심 끝에 결국 도굴을 한 경험이 있는 잠수사와 도굴꾼들을 현장에 데려와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다”고 회고했다. 도굴사건으로 구속된 잠수사 정모씨와 도굴 주범 조모씨가 발굴단의 해저조사요원에 포함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바다 속을 알 길 없는 발굴단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들 외에 바다 길을 잘 아는 방축리 주민 3명도 발굴단에 포함됐다.


이후 신안 앞바다는 마치 끝없이 보물을 토해 내는 요술항아리 같았다. 국보급 고려청자, 송나라와 원나라의 청자와 백자, 흑유(검은 빛깔의 도자기), 청동 촛대, 향로, 거울, 벼루, 맷돌, 동전 등이 그득한 나무상자가 고스란히 올라왔다. 1984년 9월까지 11차례 인양에서 나온 유물은 모두 2만 2,007점. 이 중 청자 1만 2,359점을 비롯해 도자기만 해도 무려 2만 661점이었다. 발굴 과정에서 나온 ‘지치삼년(至治參年)’이라는 목패와 ‘경원로(慶元路-지금의 중국 닝보-寧波)’라고 새겨진 ‘물표(화물꼬리표)’는 이 배가 1323년경 닝보 항을 출발해 고려를 거쳐 일본의 하카타(博多)와 교토(京都) 쪽으로 가다 난파된 원나라 상선임을 알려줬다.


3. 의의와 파장
신안해저유물의 발견과 발굴 초기에 이 유물들에 대한 감시체계가 매우 허술하여 많은 귀중한 유물들이 해외로 밀반출되었음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험난한 발굴과정을 거쳐 빛을 본 유물들로 인해, 그동안 땅만 파헤치던 우리나라 고고학계에 ‘수중고고학’의 진가를 깨우쳐 준 출발점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서해와 남서해 바다는 ‘보물선의 무덤’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신안(유물)선은 중국 남부의 광저우(廣州), 항저우(杭州), 닝보 등의 국제 무역항에서 출발해 서쪽으로는 동남아, 인도, 중동을 거쳐 유럽까지, 동쪽으로는 고려와 일본까지 이어졌던 ‘해상 실크로드’가 실재했음을 보여 주는 문화유산이다.

참고자료

경찰청,《한국경찰사Ⅳ》 삼신인쇄(주), 1994

해양경찰청, 《해양경찰50년사》 (주)범신사, 2003

동아일보, 2006년 10월 11일자

DAUM백과사전: 신안해저유물

증도사랑모임: http://cafe.daum.net/ebr2223

집필자

전대양(관동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