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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한-중수교협상과 대만문제

주제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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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배경

1988년에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국제적 화해 분위기에 따라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하여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국 중심의 교류 협력에서 중·소 및동구권 등 사회주의 제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하다는 정책적 판단 아래 ‘북방외교’를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구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모든 나라와 수교를 맺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북방외교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중국과는 미수교상태였다. 따라서 노태우 정부는 자신의 임기 중에 중국과 수교를 체결하기 위하여 외교적 노력을 다 하였다. 한편 중국은 등소평 노선에 따른 개혁 개방과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정세의 평화와 안정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과의 기술협력과 교류, 경제개발에 따른 경험의 교환 및 한중교역 확대 등 경제적 방면에서 교류의 필요성도 대두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중 양국은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시각을 갖고 수교협상을 추진하게 되었다.

내용

한국과 중국은 1991년 1월과 4월에 각각 서울과 북경에 무역대표부를 설치하고 수교를 위한 물밑접촉을 벌였다. 1991년 10월 2일 이상옥 외무장관은〈UN 총회〉에 참석 중이던 중공의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과UN 안보리 소회의실에서 〈제1차 한중외무장관회담〉을 갖고 한반도 정세와 양국관계에 대하여 협의했다. 같은해 11월 서울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 제3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두번째 〈외무장관회담〉을 갖고 수교에 대해 의견을 교환 하였다. 이후 1992년 4월 13일 베이징에서 열린 〈UN 아태경제이사회의〉 총회 때 양국 외무장관은 세번째 만남을 갖고 수교를 위한 본격적인 실무교섭을 열기로 합의했다. 당시 권병현 외무부 본부대사가 이끄는 실무팀이 5월 13일부터 6월 21일 까지 베이징과 서울에서 3차례에 걸친 교섭을 갖고 수교원칙을 재확인 한 후 공동성명 문안을 집중 협의, 구체적 쟁점을 검토하였다. 7월 29일 노창희 외무차관이 베이징을 방문 쉬둔신(徐敦信)외교부 부부장과 면담했다. 여기서 한·중수교 발표문의 문안과 발표날짜를 확정한 후, 노태우 대통령의 중국 방문 등에 대해서도 합의하고 ‘공동성명 합의문’에 가서명했다. 수차례의 협상 끝에 마침내 1992년 8월 24일 한국의 이상옥 외무장관과 중공의 첸치천(錢其琛)외교부장은 베이징에서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의 외교관계 수립에 대한 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40여년간 냉전적 관계를 유지해 온 한중관계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한·중수교 협상 과정에서 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중수교 협상 과정에서 중국측은 한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하고 대만과 단교해야 하며 한국내 대만정부 재산의 중국 귀속을 요구하였다. 한국이 이를 수용 함으로써 대만과의 공식관계 단절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문제는 대만에게 이를 어떻게 알리고 양해를 구하느냐는 점이었다. 이상옥 외무장관은 대만측과 접촉할 때마다 한중수교가 임박했음을 넌지시 알려 주었다. 그러나 구제척 시기에 대해서는 절대 보안을 지켰다. 대만 외교부와 한국내 친대만의 화교들은 1992년 4월〈한·중 외무장관 회담〉 이후 촉각을 곤두세운 채 로비와 정보수집에 열을 올렸다. 7월에는 상당수의 대만인사들을 서울에 급파·정보수집에 나섰다. 그러나 대만측으로선 한중 수교가 임박했다는 것만을 감지할 뿐 구체적 시기는 알기 어려웠다. 8월 18일 이상옥 외무장관은 주한 대만대사를 불러 한·중수교 교섭에 실질적 진전이 있었음을 통보하면서 공식 발표때까지 보안을 유지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대만 정부는 의회내 몇몇 의원들에게 정보를 전했고 의원들은 곧 대만언론에 이를 흘렸다. 마침내 8월 22일 그동안 계속 부인으로 일관했던 한국 외무부는 이상옥장관이 북경을 방문한다고 공식 발표하였고 수교가 24일 이루어 진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같은 날 대만외교부의 첸부(錢復) 외교부장은 한국과 국교를 단절한다고 정식으로 발표했다. 대만은 1992년 5월 한국에게 중국과 대만의 2중 승인방식을 취하도록 권고한 바 있다. 22일 주한 대만대사는 기자회견을 자청, ‘노태우 정부의 파렴치한 부도덕성을 비판한다’며 한·중수교를 비난했다. 대만과의 단교는 한국내 여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 대만에 대한 동정론이 강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오랜 우방국인 중화민국과의 관계 정리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 9월 15일 정일권 전 총리를 고문으로 하고 김재순 전 국회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특별사절단’을 타이완에 파견·설득 작업을 전개했다. 한국과 타이완은 단교한 지 1년여 만인 1993년 7월 27일 민간대표부 차원의 비공식 관계를 수립하고 현재 서울과 타이베이에 각각 ‘민간대표부’를 두고 있다.


한·중수교의 의의를 살펴보면, 한국과 중국의 국교정상화는 6공화국이 추진해온 ‘북방외교’의 실질적인 총결산인 동시에 동북아 냉전구조의 종결을 향한 ‘결정적인 행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중수교로 한국은 주변 4강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상화 함으로써 통일을 위한 외교적 초석을 마련 할 수 있었다. 또한 한·중 양국은 냉전시대의 적대관계를 공식적으로 마감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긴밀한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그 동안 민간차원에서 머물던 한중간의 경제관계가 정부간 수준으로 공식화하면서 교역·투자 등 경제교류가 활발히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

참고자료

김창훈,《한국 외교의 어제와 오늘》다락원, 2004
홍덕화,《두개의 중국과 실리외교》자작아카데미, 1998
《외교백서》, 외교부, 1993
《동아년감》 《동아일보사》, 1992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