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

분야별 검색

  • Home
  • 기록물 열람
  • 통합검색
  • 분야별 검색

문화체육관광

남북체육회담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남북관계발전법」(2005)

배경

광복과 더불어 찾아온 남북분단은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육계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다. 그나마 광복 직후 1946년까지는 경평축구전 등이 열려 간헐적으로 체육교류가 가능했지만 그 후에는 일체의 접촉교류가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에 남북 간 체육교류를 위한 첫 접촉이 이루어졌다. 제18회 도쿄올림픽대회 개최를 앞두고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대한올림픽위원회에 도쿄올림픽 참가 남북단일팀 구성을 권고 했고 대한올림픽위원회가 이를 수락한 것이다. 이후 약 30여 차례에 걸쳐 진행되어 온 남북체육회담은 남북관계의 변화양상과 북한의 태도변화에 따라 상당한 굴곡을 보이며 단속적으로 이어져왔다.

내용

남북한은 1964년 제18회 도쿄올림픽대회에 남북단일팀으로 참가하는 문제를 협의해 원칙적인 합의와 실무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논의의 진전을 보였다. 이때의 남북체육 회담이 비록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중재 하에 이루어졌지만 회담의 실질적인 성과여부와 관계없이 남북 간 대화의 필요성과 그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남북체육회담은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남북대회의 틀 속에서 조금씩 진전을 보였다. 1970년대 남북체육회담은 1979년 4월에 평양에서 개최된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참가와 관련해 남북한이 단일팀을 구성하는 문제협의를 위해 재개되었지만 결국 실패해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남북체육회담은 보다 폭넓게 진행되었다. 남북체육회담은 1984년에 제23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대회의 참가를 위한 남북단일팀 구성을 의제로 1984년 4월부터 5월까지 진행되었으나 공산권의 불참으로 무위로 돌아갔다. 또한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의 개최와 관련해 1985년 10월부터 1986년 6월까지 진행된 남북체육회담도 북한의 올림픽 분산개최 주장 등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1990년에 개최된 제11회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은 9차례의 회의를 걸쳐 단일팀의 호칭, 단기, 선수선발 문제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진전을 보였으나 결실을 못보고 오히려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 후에 개최된 남북체육 회담에서 급진전을 보여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남북단일팀 구성 및 참가를 성사시킴으로서 마침내 남북체육교류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특히 1990년 9월에 개최된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에서 보여준 남북공동응원과 남북통일축구의 개최합의는 1990년대로 접어드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망을 예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후 남북한 선수들이 실제로 몸을 부딪치며 경기를 하고 서로 손을 맞잡아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는 모습을 보여 남북체육교류의 위력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경험은 남북관계의 진전이 있을 때마다 거듭되어 남북통일농구대회, 남북통일탁구대회 등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2000년 제27회 시드니올림픽대회에서 남북한선수들이 코리아의 이름으로 손을 맞잡고 한반도 기를 앞장세우며 동반 입장해 전 세계에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평화의 염원을 펼쳐 보이는 벅찬 감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모습은 2002년 제14회 부산아시아경기대회와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에 처음으로 북한선수들과 응원단이 참가했고, 2004년 제28회 아테네올림픽대회와 제4회 마카오동아시아경기대회의 공동입장으로 이어졌다.

참고자료

대한올림픽위원회,《남북체육교류 자료집》, 1992
대한올림픽위원회,〈남북체육교류 국제학술대회 보고서〉《사람과 사람》, 1992
박주한,《남북한스포츠교류의 사적 고찰과 전망》한국체육대학교 박사논문, 1997
문화관광부,《체육백서 2004》문화관광부 체육국, 2005

집필자
손환(중앙대학교 체육교육과 부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