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학생들은 3·1운동, 6·10만세운동,광주학생운동 등 대규모 시위운동에 참가하거나 주도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동맹휴학을 통해 일본의 통치에 저항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운동의 이념과 실제는 시기에 따라 변화하였다. 1920년대에는 동맹 휴학의 형태로 학생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동맹 휴학은 학생들이 교육상의 여러 문제와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학업을 거부하는 집단행동으로 전국의 많은 학교에서 전개되었다. 동맹 휴학은 주로 학내 문제 예컨대 학교 시설의 개선과 교칙 개정, 수업료 문제, 학교운영자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항거, 조선어 및 조선역사 수업의 축소에 대한 거부, 일본인 교원 배척, 일제 식민지교육에 앞장서는 조선인 교원에 대한배척 등을 주장하며 전개되었으며 주로 각 개별학교 수준에서 단발적으로 전개되었다. 동맹휴교는 1920년대 초반에 빈번하게 일어났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동맹휴교의 원인은 학교 내 문제에 한정되어 있었고, 학교교육에서의 민족차별 문제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학생운동 조직들이 만들어지면서 동맹휴학 역시 민족문제 사회문제 계급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여타 사회운동단체들과 연대하여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후반 학생운동은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고 전개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학생운동 조직은 6·10만세운동까지만 해도 6·10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서울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활동했었고, 지방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6·10만세운동 이후 지방에서도 예를 들면 광주에서는 성진회, 맹휴 중앙본부, 독서회 중앙본부 등의 연대조직이 결성되어 동맹휴교를 조직적으로 지도하거나 일상적인 공부모임을 통해 반일저항의식을 함양하고 있었다. 광주학생운동은 이러한 학생운동 역량의 축적을 통해 광주, 나주, 목포, 서울로 확산될 수 있었고, 학생운동은 사회운동의 전위, 행동대 역할을 수행하는 정도에 벗어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반일운동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어 동맹휴학이나 대중적 시위는 감소하였다. 그리고 학생운동은 소규모의 비밀결사운동으로 전환되어갔다. 동시에 학생운동은 당시 사회운동으로의 방향전환과 동시에 적색노조운동,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및 민중운동과 결합하는 경향을 띠어나갔다. 적색돌격대, 적기회, 적광회 등의 사회주의 비밀 학생조직이 만들어 지고, 이들 조직 활동을 통해 학생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학습한 후 혁명적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투신하여 직업적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고자 하였다.
1930년대 이후 학생운동은 전반적으로 침체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생운동의 명맥은 유지되고 있어 일제말기에도 ‘학생사상범죄사건’은 꾸준히 발생하고 있었다.
학생운동은 6·10만세운동을 거쳐 광주학생운동, 사회주의 운동으로 확대되면서 교육운동, 사회운동, 민족해방운동으로 그 성격을 변화해갔다. 이 과정에서 학생운동은 일제시대 항일 민족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학생은 사회변혁의 한 주체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정학섭
김동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