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5월 수출확대진흥회의를 끝내고 오원철(吳源哲) 경제수석은 중화학공업 건설을 대통령께 건의하였는데 박대통령은 이에 답하여 중화학공업 육성계획 수립을 지시하였다. 이때 박대통령은 중화학공업 육성계획 수립을 지시하면서 ‘앞으로 우리나라 공업을 중화학공업으로 일대개편을 실시하되 수출산업화 한다’라고 천명하였다.
이 중화학공업을 본격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오원철 경제수석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부의 단호한 의지를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서 선언이라는 형식’을 취해 주기를 건의했고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1973년 1월 12일 중화학공업화선언을 하게 되었다.
1973년 1월 12일 박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이 중화학공업화선언을 하였다.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80년대 초에 우리가 100억 달러의 수출목표를 달성하려면 전체 수출상품 중에서 중화학제품이 50%를 훨씬 더 넘게 차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지금부터 철강, 조선, 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육성에 박차를 가해서 이 분야에 제품수출을 목적으로 강화하려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이와 함께 ‘철강, 조선, 기계, 석유 등 중화학공업 육성과 전국민적인 과학화운동은 80년대 1백억 달러 수출과 1천 달러 국민소득을 달성키 위한 주요한 경제적 기본방침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3년 1월 30일에는 「중화학공업화정책 선언에 따른 공업구조개편론」이 확정되었고 이어 3월 30일 경제기획원은 예산편성지침을 발표하면서 1974년도 경제정책의 중점을 ‘중화학공업의 집중적 건설’을 통해 수출신장 및 국제수지를 개선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중화학공업화선언에 따라 이후 한국의 중화학공업화가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고 1973년 5월 14일에는 서기원(徐基源) 경제기획원 대변인이 정부가 마련한 중화학공업건설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건설계획은 1973년부터 4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완료되는 1981년까지 중화학공업 6개 업종을 연차적으로 모두 완공시키겠다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한 것이었다.
1973년 1월 12일 중화학공업화선언으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정이 이루어지는 등 기존 경제발전전략에 전면적 수정이 이루어졌다. 중화학공업은 이미 2차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특별법으로 제정육성되고 있었지만 당시까지의 내용은 유기적 연관성과 종합계획이 없는 산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화선언으로 한국의 이후 산업정책은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전면 개편되어 한국산업사와 경제발전사에 역사적인 한 획이 그어졌다. 중화학공업화선언은 한국의 전면적인 개발전략 변경이었으며 ‘경제건설’이라는 추상적 목적이 ‘중화학공업의 건설’이라는 구체적 목표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중화학공업화 선언은 지금까지의 경공업 위주에서 과감히 탈피, 선진국 지향을 위한 중화학공업 위주로 한국경제가 탈바꿈하는 역사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었다.
중화학공업화 선언은 중화학공업화가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한 수출정책으로 진행되는 것을 확실히 하였다. 국무총리조정실은 이를 받아들여 중화학공업의 중요성, 획기적 육성의 이유로 첫째, 중화학공업은 100억불 달성을 위해, 둘째, 공업의 자립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셋째, 전후방연관효과가 크기 때문에, 넷째, 국가안보상에도 중요하므로의 4가지를 순서대로 들었다.
중화학공업화 선언으로 이후 중화학공업화는 이전 한국의 어느 산업, 경제정책에서도 보지 못했던 9년 장기계획이면서도 매우 유기적이고 정밀한 계획하에 진행되었고, 동시에 매우 세세하고 구체적인 각 공업별 실행계획과 보완계획이 제시되었다.
국무총리기획조정실,《중화학공업의 오늘과 내일》, 1973.
김정렴,《한국경제정책 30년사-김정렴회고록》중앙일보사, 1995.
오원철, <산업전략군단사>《한국경제신문》, 1993. 1. 18-1994. 3. 30.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한국공업화 발전에 관한 조사 연구(Ⅲ): 정책결정과정의 이면사》, 1979.
한국경제신문사,《한국경제》, 1993. 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