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개혁개방을 주장하면서 사회주의진영의 해체를 동반한 탈냉전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남북한도 탈냉전시대의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여 1991년 9월 UN회원국으로 동시에 가입하는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였다. 노태우 정부는 사회주의 진영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외교적 성과를 바탕으로 북한과도 관계개선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남북총리를 대표로 하는 고위급회담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로 통일지향적인 남북관계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는데 성공하였다.
〈남북기본합의서(이하 '합의서')〉는 5차례의 남북고위급회담과 13차례의 실무대표접촉을 통해 완성되었고, 1992년 2월 19일 발효되었다. 서문 외에 4장 25조항으로 구성되었다.
서문에서는 〈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한 조국통일 3대 원칙의 재확인, 민족 화해 이룩, 무력 침략과 충돌 방지, 긴장 완화와 평화 보장, 교류 협력을 통한 민족 공동의 번영 도모,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 등을 규정하고 있다.
제1장은 남북화해에 관해 다루고 있는데, 특히 상호 체제 인정 및 존중, 내부 문제 불간섭, 비방·중상 중지, 파괴·전복 행위 금지, 정전상태의 평화상태 전환, 국제무대에서 대결과 경쟁 중지, 민족 성원 상호 간의 화해와 신뢰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제2장은 남북 불가침에 관해 규정하고 있는데, 주로 무력 불사용과 무력침략 포기, 대립되는 의견이나 분쟁의 평화적 해결,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 명시, 남북 군사공동위원회 구성 및 운영, 남북 군사당국자 간 직통전화 설치 등을 명시하고 있다.
제3장은 남북 교류 협력에 관한 내용으로, 주로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민족 전체의 복리 향상과 민족 공동체의 회복·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실천적 조치 등을 담고 있다. 제4장은 수정 및 발효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밖에도 〈남북기본합의서〉에서는 각 장마다 협의 실천기구인 분과위원회·공동위원회·남북연락사무소에 관한 조항들을 설정하고 있다.
이로써, 남북한이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고, 군사적 침략이나 파괴·전복 행위를 하지 않으며, 상호 교류 협력을 통해 민족 공동 발전과 점진적·단계적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 이후 남북 관계는 다시 경색되었다.
이 〈합의서〉는 남북 간의 자주적 차원에서 화해와 협력의 토대를 구축하는 동시에 평화정착을 위한 틀을 마련하고 새로운 통일시대를 열어 나갈 수 있는 전제를 마련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 남북한이 공히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파괴 혹은 전복 행위를 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상대방 체제를 위협하는 행위를 금지하는데 약속하였다. 이에 따라 분단이래 지속되고 있는 ‘불안정한’ 평화상태를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켜 나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합의서〉는 남북관계 전반에 관한 포괄적인 원칙에만 역점을 두고 구체적인 실행방법에 대해서는 후속회담을 통해 논의하도록 되어 있는 상징적인 합의문건이었다. 이후 남북 쌍방은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구체적 대책을 협의하는 과정을 거쳐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1992.9.15.~18.)에서 남북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를 채택, 발효하였다. 1992년 합의 내용의 실질적인 이행은 후속회담으로 상정된 정치분과위원회, 군사분과위원회, 교류협력분과위원회, 핵통제분과의원회 등 4개 분과위원회에서 논의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1992년 3월부터 12월까지 각 분과위원회 별로 적게는 7회, 많게는 13회에 걸쳐 남북협상이 진행되었지만 아무런 합의성과를 내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분야별 후속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북한은 남한의 한미합동 군사훈련을 구실로 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한 분과별 회담의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정대진 〈남북한 기본합의서의 규범적 성격연구〉 《통일연구》 18권 1호, 2014
통일연구원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의 의미와 대북정책 방향〉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18주년 기념 국제회의 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