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바뀌어 1948년 1월 유엔 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왔다. 유엔이 자주독립을 갈구하는 우리의 뜻을 받아들여 위원단을 파견했으나 소련이 이들의 북한 입국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통일정부 수립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5월 10일 유엔 감시가 가능한 남한 지역에 한에서 우리나라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 총 선거가 실시됐다. 5월 31일 198명으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이승만 박사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7월 20일 국회에서는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 부통령에 이시영 씨를 각각 선출했다. 1948년 8월 15일 해방 세 돌을 맞은 그날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됐다.

반세기만에 주권을 되찾은 겨레의 가슴은 벅차올랐으나 통일정부 수립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마음 한 구석을 비게 했다.

이 무렵 북한에서는 공산당 독재체제 아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고 9월 9일에는 괴뢰 정권인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 초대 내각 수상으로 취임한 김일성은 미·소 양군 철수 등 8개 항의 정강을 내세움으로써 이때 이미 침략 흉괴를 드러냈다. 양군 철수를 전제로 한 그들의 군사조직은 사전에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젊은이들을 군대에 끌어들이는 한편 해방 이듬해 모든 산업을 국유화 하고 북한 동포들을 강제노동으로 계속 몰아세웠다. 당시 공업지대였던 북한 땅에서는 이글 기반으로 곧 전쟁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 그림은 6.25때 북괴군 전선 사령관이던 김책의 작업현장 독려 실황이다. 그는 6.25때 낙동강 전투에서 죽었다.

북한 땅의 심한 강제노동에 견디다 못해 남으로 발길을 돌리는 북한 동포들.

당시 북한에는 군수산업으로 바꿀 수 있는 공업시설들이 많았으며 발전시설은 우리나라 전체의 92%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48년 5월 14일 그들은 남한에 대한 송전을 중단해버렸다. 한편 농업위주의 남한은 경공업뿐이었고 그마저 단전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 1948년 12월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한데 이어 1949년 1월에는 군사 사절단을 평양에 보내왔다. 이를 계기로 6.25 남침을 위한 괴뢰군의 침강작업은 본격화 됐다. 이것은 당시 북괴군이 소련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장면이다. 또한 해독불가(05:35)이 이끄는 한인계 팔로군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에 들어왔다.

더욱이 3월에는 김일성이가 모스크바로 가서 허울 좋은 조·소 경제문화 협정을 맺었다. 또한 같은 날 비밀리에 무기반입을 주 내용으로 한 소위 조·소 군사비밀협정을 체결했다. 그 후 소련으로 부터는 T34형 탱크를 비롯한 각종 무기와 장비들이 속속 북한으로 반입됐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국회에까지 공산세력이 침투하고 있었다. 김약수 등 소장파 의원들이 남로당의 끄나풀로써 외국군 철수 안을 내놓으면서 북괴정권의 주장에 보조를 맞췄다. 이른바 국회의 프락치 사건이다. 나라가 어수선한 가운데 백범 김구 선생의 죽음은 큰 충격이며 슬픔이었다. 범인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진 선생의 유해는 국민장으로 안장됐다.

정부수립 후 겨우 창설된 당시 국군의 장비는 중부장한 북괴군에 비해 너무나 빈약했다. 일본군이 남기고간 구식 소총과 몇 문의 박격포 그리고 훈령용 경비행기 22대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북괴군의 도발이 잦았던 38선 인근 주민들은 스스로 향토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죽창을 들고 나서기까지 했다.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던 그때 우리는 나라의 안전보장을 외치며 미군의 철수를 반대하고 나섰으나 그것은 메아리 없는 외침이었을 뿐 1949년 6월 미군은 이 땅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다. 더욱이 당시 미국의 행정부는 에치슨라인이라는 새로운 극동방위선을 발표, 한국을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이렇게 완전히 빼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