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도는 50년 12월 20일부터 이듬해 1월 20일 사이 유엔군의 후퇴상황을 표시한것이다. 중공군의 기세는 오산 충주 제천 삼척을 잇는 선에서 꺾였다. 유엔군은 새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땅이 얼어서 참호도 파기 힘들었다. 서울 안방까지 진격했던 중공군 주력부대는 이때 유엔군과의 접전을 피하고 일단 후퇴했다. 이는 후방으로부터 전쟁 수행물자의 공급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후퇴하는 중공군을 찾아 강타하는 유엔공군 이때부터 미공군 로켓포의 위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엔군은 다시 북진했다. 갑자기 중공군이 후퇴했기 때문에 혹시 함정에 빠지지 않을까 염려되어 조심스럽게 진격했다. 수원 팔달문을 통과하는 유엔군 탱크 팔달문은 우리민족의 상처인양 지붕이 부서져있었다. 2월에 접어들자 해동이 되면서 비가오기 시작했다. 한강 상류에 도착한 유엔군은 부교를 만들어 강을 건넜다. 유엔군이 한강이 바라보이는 노량진에 진입한것은 2월 20일 경이었다. 중공군도 지쳐 투항자가 많았다. 한강 인도교로 진격하는 한국군 한국군과 유엔군이 한강을 건너 서울을 다시 찾은것은 3월 14일이었다. 70여일만에 다시찾은 서울은 텅 비어 있었다. 인적없는 유령도시같은 서울 간혹 중공군만이 저항없이 유엔군에 투항할 뿐이었다. 그때에 세종로 일대 국군은 두 번째로 중앙청에 태극기를 걸었다. 서울을 탈환하면서 유엔군은 문산 지구에 낙하산 투하작전을 펼쳤다. 탱크등 중무장비 까지 낙하산으로 투하한 이 작전에서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과 기동력을 충분히 과시했다. 피난 못간 국민들은 몇차례씩 밀고 밀리는 전쟁터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떤 노인은 한깃대에 태극기와 북괴기를 같이 걸고 국군을 맞이했다. 임진강 도하작전은 한국군이 맡았다. 탱크부대의 진격 중공군은 3월 18일부터 유엔군과의 접촉을 의식적으로 끊고 후퇴하면서 75만명의 대군으로 새로운 봄철 대공세 작전을 착착 준비하고 있었다. 아군은 3월 하순 또다시 38선을 넘을수가 있었다. 51년 4월과 5월 중공군 춘계 대공세가 펼쳐졌다. 중공군 춘계공세에 유엔군은 서울 북방까지 밀렸다. 유엔군의 후퇴길에 한국 강산은 마지막 화염으로 해독불가(7분 30초)해있었다. 4,5월 사이 중공군 75만명 유엔군 45만명 도합 120만명의 대군이 한국산야에서 접도했다. 의정부를 철수하는 유엔군 전선을 정비하기 위해서 유엔군은 의정부 방위선에서도 후퇴 서울 북방에 진을 쳤다. 이른바 링컨 라인이다. 중앙청 앞마당에 진지를 구축하는 유엔군 이전투에서 미군의 화력앞에 중공군의 인해전술도 이제는 힘을 쓸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중공군의 춘계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인해전술과 화력전술의 일대 결전에서 전세는 유엔군측으로 유리하게 기울었으나 후방기지의 봉쇄없이는 완전히 승리할수 없다는 점을 알게됐다. 맥아더 장군은 전세 완전 역전을 위해 만주폭격을 계속 트루먼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한편 중공군은 춘계공세 실패후 유엔주제 소련대표 말리크를 통해서 휴전을 제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