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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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 문화협력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1982년 한·일 양국 간에 야기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은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 기도로 한국정부와 국민들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마침 양국간 현안으로 대두되었던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의 명분을 둘러싸고 한·일 관계는 긴장 국면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중 양국의 강경한 태도와 국제사회의 여론 앞에 일본은 정부의 책임 아래 역사교과서 왜곡을 시정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견해를 발표하였다. 그 결과 1124일 일본정부는 근·현대사의 역사 기술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의견을 적극 배격하겠다는 새로운 교과서 검정기준을 발표하였다. 이른바 근린제국 조항또는 주변국 조항이라는 정치·외교적 교과서 검정기준이 새로 추가된 것이다.

 

이 일본교과서 파동을 겪으면서 한국은 다시는 일제침략과 같은 민족 수난을 재현하지 않겠다는 자각과 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국민 성금으로 독립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노태우 정부 하의 대일 관계 중 문화·역사 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당시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역사문제가 계속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19938월 일본 정부의 관방장관인 고노 요헤이 장관은 그간 한·일 간에 격렬한 논란이 되어 왔던 군대 위안부 문제에 관해 공식입장을 천명하였다. 소위 고노 담화는 태평양 전쟁 당시 국민총동원령을 집행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종권위안부의 강제모집에 나섰던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이 이루어지면서 나오게 되었다. 요시다의 증언이 1991년 아사히 신문에 보도되어 종군위안부 문제가 관심을 받게 되었고, 실제 위안부들의 공개증언도 뒤따랐다.

 

따라서 종군위안부의 존재와 그에 대한 배상·보상 문제는 1990년대 이후 한·일관계의 가장 뜨거운 쟁점 중의 하나였다. 1965년에 체결된 ·일 기본조약재산 청구권에 관한 협약에 의해 형식적인 전후처리 문제는 종료되었지만 종군위안부 문제는 논외로 취급되었다는 전제하에 한국은 1990년대 이후 종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일본에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내에서는 종군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혹은 위안부는 상행위의 일부라는 등의 몰역사적인 입장을 주장하는 일부 인사들도 등장하는 등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성의 있는 대처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1993년 발표된 고노 담화는 치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군대위안부에 대한 일본관헌의 관여가 있었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강제성이 있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에 대한 사죄의 의사를 표함으로써 종군위안부 문제해결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고노담화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정부차원의 보상배상 조치에는 부정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 대신 민간차원의 기금을 조성하여 과거 위안부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아시아여성기금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위안부 당사자들의 거부에 의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즉 위안부 당사자들은 일본정부의 공식사죄와 반성, 그리고 그에 따른 배상과 보상을 요구하며 아시아여성기금의 조치에 대해 일부를 제외하고 이를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

 

1998일 파트너쉽 공동선언채택 이후 전반적으로 양호했던 양국 관계는, 20014월 일본 정부가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후소샤(扶桑社)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검정 합격시킴으로써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200110월 고이즈미 총리 방한시 한일 정상 간에 역사교과서 문제해결 노력의 일환으로 일 역사공동연구기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하고 20023월 동 기구를 정식 발족시켰다.

 

일 역사공동연구기구는 양측 각각 10여명의 역사학자 및 전문가로 구성되는 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이하 연구위원회’)와 이 위원회의 연구를 지원하는 민관 합동의 한일 역사공동연구지원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2년 간의 활동 후(필요시 연장가능) 보고서를 작성, 관계기관에 배포주지시킴으로써 장차 양국 역사교과서 편수과정에 참고토록 하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20014월 취임 이후 20031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A급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김대중 정부는 올바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인 한일 우호관계를 구축해 나간다는 원칙 하에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일본의 성의있는 해결노력을 계속 촉구하였으며, 이 문제가 양국관계 발전에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도록 일본의 적극적인 노력을 요청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역사문제로 일본, 중국과 갈등을 겪었다. 일본의 경우는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심각한 사안으로 대두되었고, 중국과는 고구려사 왜곡, 이른 바 동북공정이 외교갈등 사안이 되었다.

 

노무현 정부의 외교에서 대일외교는 초기의 이른 바 셔틀외교로 순항하다가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로 노무현 대통령이 각박한 외교전쟁을 선포한 이래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고이즈미 수상을 이어 집권한 아베 수상도 퇴진한 현재 일본은 후쿠다 야스오 내각이 들어서면서 아시아관계의 개선이 전망되었다.

 

하지만 후쿠다 내각 치하에서도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는 쉽게 개선될 것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일본에서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어느 한 정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사회의 전반적인 보수우경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후소샤의 자유주의 사관을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들의 역사 재평가와 교과서 개편 운동은 1950년대나 1980년대의 교과서 논쟁과 달리 일본사회 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확대되고 있다. ‘자유주의 사관을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도 인정하고 있듯이 자유주의 사관의 역사해석과 주장은 일반국민들, 특히 젊은 세대와 교육현장의 교사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1990년대에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나타난 일본 사회의 변화는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불안감을 가지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전과 달리 자신감의 상실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일본 사회 내에서는 일본경제의 침체에 대한 패배감의 반작용으로 강한 일본을 재건해야 한다는 내셔널리즘적인 열망이 강하게 대두되었고, 정치에 대한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 국민의 열망과 희망은 일본의 자유화와 개혁을 유도하는 긍정적인 방향과 일본의 정체성 확립을 주장하는 우익 세력의 새로운 역사해석에 동조하는 부정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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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전상숙(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 황지환(서울대 통일연구소 선임연구원) / 이상현(세종연구소 안보연구실장) / 이상현(세종연구소 안보연구실장)

최초 주제 집필
2017. 12. 26

최종 주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