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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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외교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배경
                                                                                      

아시아 안보는 아시아 손으로라고 요약되는 닉슨 독트린발표(1969.7) 이후 주한미군 2만 명이 감축되었고, 미소/미중 데탕트 무드 조성이 국제사회의 주요한 변화로 나타났다. 이러한 국제상황을 배경으로 박정희 정부는 우리의 경제력이 북한과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함에 따라 조심스럽게 남북대화를 추진했다.


우리의 대북외교 또는 대북접촉의 목표는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을 최소화하고 궁극적으로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다.


경과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단절되었던 남북관계는 1970년대 초부터 개선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19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 적십자회담이 이산가족 상봉 문제로 판문점에서 개최되었다. 적십자회담은 19737차 회담을 끝으로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지만, 실무회담은 1977년까지 25차례 진행되었다. 물론 당시 이산가족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남북한이 마주앉아 회의를 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의미 있는 성과였다.

이와는 별도로 남북한은 비밀 접촉을 통해 1972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공동성명의 핵심 내용은 조국통일 3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상호비방 중지, 우발적 군사충돌 방지, 남북교류 활성화,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이다. 특히 남북조절위원회 설치에 합의함으로써 실질적인 대북외교가 시작되었으며, 본회담 6차례, 부위원장 회의 10차례가 진행되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1973623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을 통해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가능성을 밝혔고, 거의 20년이 지난 1991년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그 사이 북한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에 반대하면서 남북한이 외교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노태우 대통령은 198877선언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표명했으며,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비밀리에 정상회담도 두 차례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남북접촉으로 19909월 남북고위급회담이 개최되었고, 19911223일 제5차 회의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북한 핵사찰 문제로 남북관계는 다시 경색되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추진된 햇볕정책으로 대북외교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2000615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계승한 노무현 정부도 2007104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은 대북외교의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약 10년 동안 남북관계는 거의 단절되었는데 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이종석, 《한반도 평화통일론》, 한울, 2012.
유석렬, 〈통일문제와 남‧북한 관계〉; 정일영 편, 《韓國外交 半世紀의 再照明》, 나남, 1993.

집필자
이대우(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17. 12. 26

최종 주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