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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강릉지역 대침투작전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원인
강릉지역 대침투작전은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상어급 잠수함이 강원도 강릉시 동해안 일대에 침투하여 정찰 공작 활동을 벌이고 복귀를 시도하던 중, 꽁치잡이 그물에 걸려 잠수함이 좌초되어 해상 복귀가 불가능해지자 육로를 통한 복귀를 시도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1996년 9월 18일 01:17분경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상에서 제68사단 초병과 택시기사 이〇〇씨가 50m 해상에서 좌초한 북한 잠수함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고, 11월 5일 인제군 연화동에서 잔존한 정찰조 2명을 사살할 때까지 총 49일간 실시되어 내륙으로 도주한 무장공비 26명을 책임지역 내에서 일망타진함으로써 종결되었다. 
내용
국방부는 북한 잠수함의 침투목적을 비행장, 항만, 레이다 기지 등 주요 군사시설의 정탐, 잠수함 등을 이용한 수중침투방법을 시험하고 침투여건을 확인하기 위함으로 판단하고 있다. 침투 인원은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정찰국 직속 22전대 소속으로 총 26명(잠수함 승조원 21명, 안내조원 2명, 정찰조원 3명)이었다. 이들의 계급별 분포를 보면 대좌 1명, 상좌 1명, 중좌 2명, 소좌 1명, 대위 5명,상위 5명, 중위 2명, 소위 4명, 계급이 알려지지 않은 인원 4명이었다. 















강릉지역 대침투 작전에는 현역군인 육군 1군 사령부 외 28개 부대, 해군에서는 1함대사령부, 해군작전사령부, 공군에서는 10전투비행단 및 공군작전사령부 등이 참가하였다. 예비군은 총 6개 시 7개 군에서 4만 5천 명이 참가하였다. 이 작전은 평균 일일 전투병력 4만 2천 명, 연일 전투인원은 150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작전이었다. 















작전경과는 다음과 같다. (1) 1996년 9월 14일 5시 경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직속 정찰조 3명과 동 소속 해상처 처장 대좌 김동원을 포함한 승조원 및 안내조 등 도합 26명은 소형 잠수함(상어급, 350톤)에 승선 함경남도 퇴조항을 출항, 북방한계선을 통과하여 15일 강릉시 안인진리 앞바다에서 잠망경을 이용 침투 위치를 사전 정찰한 후 외해로 이탈 해저에서 정박 대기하였다. 9월 16일 23시 30분 경 전날 정찰한 해안에 접근하여 정찰조 3명, 안내조 2명을 침투시켰으나 파고 등 기상 악화로 안내조가 복귀하지 못하자 다시 공해상으로 이탈하여 수심 60미터 해저에서 대기하다가 17일 22시 30분 경 기(旣)침투시킨 정찰·안내조 5명을 복귀시키기 위해 해안으로 접근 시도 중 무리한 조함으로 좌초, 부득이 잠수함을 불태우고 잔여인원 21명 전원이 상륙 침투하였다. 















9월 18일 1시 17분 경 제68사단 제173연대 23소초 근무자(이병 최〇〇)가 초소 남방 3키로미터 지점 해상에서 미상의 불빛과 연기를 관측하고 소초장에게 보고하자 소초장은 인접 25소초장에게 통보하였다. 한편 1시 35분경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7번 국도를 지나던 택시기사(이〇〇)가 거동수상자 및 의아선박을 발견, 강동파출소에 신고하고 1시 45분 경 25소초장이 출동준비 중 강동파출소 허〇〇 순경과 택시기사가 소초에 도착, 의아선박 발견사실을 신고하여 대대에 상황보고를 하고 2시경 현장 확인(소초장, 경찰, 택시기사)을 하였다. 9월 18일 2시 44분경 제68사단 제173연대 제1·2대대 5분 대기조가 현장에 도착하였고, 3시 5분 경 제173연대 정보분석조가 현장에 도착, 침투 흔적(북한제 껌, 권총 실탄 등)을 발견하였으며, 좌초된 선박은 북한 유고급 잠수정으로 판단하였다. 제68사단은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해안경계 A형 근무투입 및 강릉 동해지역 예비군 작전 동원 지시를 하고 4시 28분 해군 1함대사령부 고속정 2척이 안인진리 해상 현장으로 출동하였고 침투 원점 부근 7번국도상에서 물 묻은 오리발 족적을 발견하였다. 















육군 1군사령부는 9월 18일 5시 군 지역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작전을 통합 지휘하도록 하였으며, 7시 10분경 해상 대테러요원인 703특공연대 16명을 현지로 출동시키고 제36사단 및 제8군단 병력이 차단선을 점령하였으며, 7시 40분 경 제173연대 및 연대직할 병력 229명이 제1차단선을 점령하였고, 잠수함 발견지점과 3.5km 떨어진 동해 1터널 뒤편에서 총성을 청취하였다는 주민신고가 있었다. 8시 수색병력은 괘방산 부근 8부 능선에서 권총 1정, 수류탄, 기관총 및 AK소총 실탄 등 간첩장비 다수를 습득하고 11시 55분 경 해군 UDT·EOD 요원 7명이 잠수함 내부에 진입(잠수함 내격실 개방 된 채 전소)하여 제원을 확인한 결과 길이 35미터, 높이 6.7미터의 상어급 잠수함으로 확인하였다. 















정부에서는 9월 18일 12시 10분 강원도 전 지역에 통합방위 “을종사태”를 선포하였다. 아군은 특전사 제3여단 2개 대대를 1군사령관 작전통제로 전환하고 제8군단 및 제36사단에 군견 44두를 배치, 작전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16시 30분경 헬기로 수색 중이던 제508정보부대 요원이 강릉시  강동면 산성우리 청학산 8부 능선에서 공비 시체 11구를 발견, 작전부대에 통보함으로써 제173연대 2대 병력이 출동하여 사체를 확인하고 중앙합동신문조의 현장분석 결과 공비 11명 모두 두부 관통상에 의해 사망되었고, 사체가 일렬로 나열되어 있으며, 반항한 흔적이 전혀 없는 점으로 보아 생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한 함장이 사살 후 도주한 것으로 분석하였다. 















9월 18일 16시 45분 경 강릉시 모전리 8반 거주 정〇〇씨가 거수자를 발견 강동파출소에 신고하였으며, 파출소장의 무전 지시에 따라 모전리 검문소 경찰관 근무자 2명이 현장으로 출동하여 공비(이광수)를 생포하였다. 

일자별로 진행되었던 주요 작전 경과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1) 9월 18일 16시 39분, 공비 사체 11구 발견, (2) 9월 18일 16시 45분, 무장공비 1명 생포, (3) 9월 19일 14시 10분, 무장공비 3명 사살, (4) 9월 19일 16시 13분, 무장공비 1명 사살, (5) 9월 20일 10시 20분, 비트 유기물 발견, (6) 9월 22일 01시 40분, 무장공비 1명 사살, (7) 9월 22일 06시 45분, 무장공비 1명 사살,  (8) 9월 28일 06시 40분, 무장공비 1명 사살, (9) 9월 30일 15시, 무장공비 1명 사살, (10) 11월 4일 15시 10분, 거수자 2명 출현, (11) 11월 5일 4시 28분, 매복조 적과 교전, (12) 11월 5일 10시 30분, 정찰조 2명 사살 















작전결과로 적 26명 침투 중 사살 및 자살 25명, 1명을 생포함으로써 완전작전을 실시하였다. 또한 잠수함 포함 367종 4,380점을 노획하였는데 무기류는 RPG-7 대전차 로켓 외 18종, 1,977점을 통신 및 정찰장비로는 난수표 외 14종 54점과 카메라 외 15종 49점, 침투장비 및 기타: 잠수복 외 30종 111점과 아군의 군복 외 251점 1,823점을 노획하였다. 















작전간 아군 피해 상황으로 전사 및 사망자가 17명(군인 11, 예비군 1, 경찰 1, 민간인 4) 발생하였고, 27명(장교 7, 부사관 2, 병 18)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민간 손실액은 2천억 원에 달했다. 작전 중 유일하게 생포된 이광수(1965년 생)는 조사를 받은 뒤 대한민국으로 전향하여 1997년 해군에 입대해 현재 군무원으로 근무 중에 있으며 군인들을 대상으로 안보강의를 하고 있다. 















사후처리 
군은 작전 후 기존 68동원사단을 해체하고 상비사단인 23사단을 창설하였으며, 해군 1함대에도 전력을 보강하였다. 북한은 9월 23일 인민무력부 담화를 통해 “훈련 중 기관 고장을 일으켜 표류하다 좌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한 정부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않자 10월 2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 비서장 접촉에서 남한을 협박하기까지 했다. 한국정부에서는 대북 강경론이 득세하게 되었고, 대북경협 동결과 경수로 부지 인수와 서비스 의정서의 서명을 거부했다. 또한 당시 4자회담 거부의사도 분명히 밝혔다. 이에 따라 미국이 양측을 중재하여 마침내 1996년 12월 29일, 북한은 이례적으로 잠수함 사고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재발 방지 노력을 약속하는 공식적인 사과를 발표하였고 12월 30일, 사망한 24명의 시신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송환되었다. 이날 있었던 송환은 남북한 사이의 첫 시신 송환으로 기록되었다. 1997년 7월 국방부는 사고 현장에 공원을 조성하여 좌초된 잠수함을 영구적으로 전시할 것을 발표하였다. 


참고자료
국방부, 《국방백서1997∼1998》, 국방부, 1997.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대비정규전사 III》,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편년사 1991∼1997》,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5.
집필자
최정준(국사편찬연구소 국방사 연구원)
최초 주제 집필
2017. 12. 26
최초 주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