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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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군사분계선 침투

주제유형
사건/사고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원인
1970년대 초까지 북방의 북방한계선에 해상도발은 제한적이었지만 침투로 개척, 무장간첩선 침투, 해상 포격 등이 많았다. 휴전 후 북한 해군은 해안포를 설치하고 소형함정과 잠수함을 증강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해상침투용으로 40척 이상의 쾌속 무장선박을 보유했다. 이에 비해 아군 해군이 취약해 일반 선박은 물론 함정도 육지 연안 쪽으로 다녀야 했다.


내용
1) 북방한계선의 설정과 분쟁
정전협정에 해상분계선 설정에 대한 조항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유엔군사령관은 정전협정 체결 직후 1953년 8월 30일 남북한 무력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북방한계선(NLL)을 설정했다. 서해해역에는 짙은 해무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으로 북방한계선에 대한 우리 어선의 월선은 물론 북한어선의 침범사례가 발생하였다. 더욱이 북방한계선 부근에 황금어장이 형성되면서 서해에서는 조기잡이, 꽃게잡이, 동해안에서는 명태, 대구잡이 시기를 전후하여 월선, 침범 등의 문제가 자주 발생했다. 


서해에서 조기잡이는 1962년 경부터 연평도에서 사라지고 점차 어장이 흑산도, 추자도 근해에 형성되었다. 북한 함정은 서해 4도의 접속 수역 내에서 일련의 도발적 해상활동을 시작했다. 북방한계선을 둘러싼 분쟁은 서해뿐만 아니라 동해에서도 발생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국제적으로 영해 영역이 12해리가 일반화되면서 중간 수역에 해당하는 소청도와 연평도 사이에서 점차 분쟁이 늘게 되었다.

2) 아군의 경계 작전
우리 해군은 미 제95기동함대 사령관으로부터 작전지휘권을 인수해 1954년 9월 남해, 1955년 1월 동해, 3월 서해 순으로 전 해역을 독자적으로 방어하였다. 해군이 어로보호 작전을 시작한 것은 1957년 9월 20일 해무청장이 국방부장관에게 연평도 근해의 어로 보호를 의뢰하면서 부터이다. 우리 해군은 접적 해역에서 우발적인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의 경비정과 어선 동향을 대비하면서 어로 한계선을 넘지 않도록 조업어선 통제, 불법 중국어선 단속 등을 수행하였다.

3) 북한 침범사례 증가와 아군의 대응
1953년부터 1999년까지 유엔군 측이 공산 측에 항의한 주요 해상 위반사건은 108건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1960년대까지 1954년 1건, 1957년 1건, 1958년 3건, 1960년 6건, 1967년 8건, 1969년 16건 등이 발생했다. 서해상의 군사분계선 분쟁은 197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북한함정은 1973년 10월부터 12월 중순까지 43회에 걸쳐 서해 북방한계선을 의도적으로 불법 침범했다. 이 때 북한은 서해 도서를 왕래하는 우리 선박들이 북방한계선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러진 우회항로를 택했는데도 위태로울 정도의 행해 교란을 시도하였고 서해 4도로 가는 뱃길을 차단하기도 했다.


1973년 서해 사태 이후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 해군력도 증강되었다. 1974년 3월 11일 도서경비부대를 도서방어부대로 증편하고, 연평부대를 새로 편성했다. 1974년 3월 13일 처음으로 대청도에도 병력을 상주시키고, 레이더를 비롯한 해안가에 기뢰를 부설하였다. 1975년 4월에는 대형 고속정이 도입되어 속도 면에서 북한 경비정을 추격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우리 해군은 한미연합 대잠훈련(적잠수함 색출작전)을 실시하고 1976년부터 해상초계기를 도입하여 해공 합동 대잠능력을 향상시켰다.


근거
해상군사분계선은 유엔군사령관은 정전협정 체결 직후 1953년 8월 30일 남북한 무력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설정한 북방한계선(NLL)이다.


참고자료
신오성,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국방군사연구소, 199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 4》, 2002.
국방군사연구소, 《대비정규전사 2》, 1998.
조성훈, 《대남도발사》, 백년동안, 2015.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군사연구부장)

최초 주제 집필
2015. 11. 19

최종 주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