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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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만행사건

주제유형
사건/사고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원인
공동경비구역은 판문점 회담장을 중심으로 한 직경 800미터의 지역으로 양측이 각기 30명 이내의 경비 병력을 배치하도록 휴전협정에 규정되어 있으며, 경비병들은 협정에 의하여 신변안전이 보장되어 있었다. 북한군 만행의 발단은 한국 노무자 5명이 미군과 한국군의 호위하여 제3경비초소 부근의 나뭇가지를 치고 있을 때 2명의 북한군 장교와 수명의 경비병들이 작업현장에 나타나면서 비롯되었다.


내용
1) 북한군의 만행
1967년 8월 18일 10시 45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노무자들의 작업을 감독 및 경비하던 유엔군 측 경비병을 북한 경비병 약 30여 명이 도끼와 곡괭이 등을 휘두르며 습격함으로써, 미군장교 2명이 피살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한국노무단 12중대 소속 작업반장 곽덕환은 이날 노무자 4명과 함께 소위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에 있는 높이 15미터짜리 25년생 미루나무 가지를 전지하기 위해 같은 날 10시 20분경 미군장교 2명 등의 경호를 받으며 출발하였다. 


이 때 주변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북한군 20여 명 중 30세 가량의 북한군 중위 2명이 느닷없이 “더 이상 가지 치지 말라”며 고함을 질렀고, 한국군 김문환 대위가 미군장교에게 통역을 하는 사이, 북한군은 “더 치면 죽여 버린다”고 하면서 주먹을 둘러대기 시작했다. 미루나무 밑에서 미군과 북한군 장교 사이에 입씨름이 벌어졌는데, 이 때 북한군 장교 2명과 사병 20여 명이 달려들어 습격하였다.


2) 미군과 한국군의 피해
미군장교 2명은 도끼 등으로 습격하는 30여 명의 북한군 경비병에게 두들겨 맞아 살해된 것이고, 기타 1명의 한국군 장교와 4명의 한국군 사병 및 4명의 미군 사병이 부상을 입었다. 미군 장교 피살자는 경비중대장 아더 부니파스(Arthur G. Bomifas) 대위와 소대장 마크 바레트(Mark T. Barrett) 중위였다. 미군 측은 북한 측이 처음에 가지치기에 동의했으나 작업이 진행될 때 공격하였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북한과 미국이 가장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가장 첨예한 대립을 표출한 것으로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던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조성되었다. 


3) 미군의 대응 조치와 북한의 유감 표명
미국은 즉각 오키나와와 아이다호주, 괌에서 즉각 F-4, B-52 등 항공기를 발진시켜 무력시위를 전개한 후 문제의 미루나무를 1997년 8월 21일에 베어냈다. 나무 한 그루 베는 일을 엄호하기 위해 항공모함과 핵폭탄 적재가 가능한 전폭기가 출격했다는 사실은 북한에 대한 경고이면서 유엔사 경비부대의 안전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유엔군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의지의 상징이었다.


북한 측의 주장에 의하면, 오히려 유엔군 측 미 장병 4명이 보안구역에 도끼를 들고 그들의 허가를 받지 않고 나무를 찍기 시작했으며, 북한 병사들이 나무는 자신들이 심었기 때문에 자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했다. 김일성도 미군이 일으킨 계획적 도발사건이라면서 “판문점 사건을 도발하기 위한 준비를 미리부터 하였고, 사진기도 설치해 놓았다”며 북한병사들이 미군의 도발 혹은 정치적 음모에 걸려들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사건의 야만성으로 인해 세계여론이 악화되고 유엔군 측의 무력시위가 이어지자 결국 김일성은 유감을 표명해야 했다.


근거
도끼만행사건은 1967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노무자들의 작업을 감독 및 경비하던 유엔군 경비병을 북한 경비병들이 도끼와 곡괭이 등을 휘두르며 습격한 사건(유엔군사령부 발표)이었다.


참고자료
신오성,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국방군사연구소, 199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 4》, 2002.
국방군사연구소, 《대비정균전사 2》, 1998.
조성훈, 《대남도발사》, 백년동안, 2015.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군사연구부장)

최초 주제 집필
2015. 11. 19

최종 주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