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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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구국의 3대 전투

주제유형
역사적사건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배경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하여 3년 1개월간 계속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금수강산 곳곳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고초를 겪었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수많은 전투에서 풍전등화에 처한 조국을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다부동전투, 인천상륙작전, 장진호전투는 6.25전쟁의 수많은 전투 가운데 가장 치열했고, 절제절명의 위기에서 조국수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구국의 3대 전투로 손꼽힌다.

내용
1) 다부동전투
1950년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전투로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조선민주주의인민군의 대공세를 저지시키고 대구로 진출하려던 적들의 기세를 꺾었다.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릴 정도로 치열한 전투로 유명하다. 6.25전쟁 발발 후 북한은 무기와 훈련이 부실한 국군을 연이어 물리치고 승리하여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 7월 5일에는 오산 전투에서 미군까지 격파하고 7월 24일 대전, 7월 말 목포와 진주, 8월 초 김천과 포항을 함락시켰다. 또한 북한은 1950년 8월 임시 수도 부산과 대구로 통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대구 공격에 투입된 5개 사단 중 제1사단, 제13사단, 제15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대구 축선에 집중시켜 공격했다. 이에 국군은 왜관에서 낙성리까지 국군 제1사단, 낙성리에서 의성까지 제6사단, 현풍에서 왜관까지 미 제1기병사단 등 3개 사단을 배치했다. 


제1사단은 1950년 8월 1일 미군 제25사단으로부터 책임 구역을 이어 받아 9일 동안 낙동강 연안에서 전투를 벌여 6867명을 사살하고 각종 포 23문과 탱크 10대를 파괴했다. 같은 해 8월 11일 육군은 왜관 북방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으로 이동하여 적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아 국군 제1사단은 강변 전투를 종결하고 8월 12일 야간에 새로운 다부동 전선으로 이동하여 8월 30일까지 전투를 지속하였다. 이 전투에 대한민국은 국군, 학도병, 노무자를 포함하여 약 2만여 명이 참가하여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북한군은 약 3만 명이 참가하여 1만 7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2)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시작된 상륙작전으로, 6.25전쟁 전반의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작전 암호명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었다.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전쟁이 발발한 지 4일 지난 뒤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며 조선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미국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구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 데다가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의 일부 인사들이 작전 성공률이 1:5,000대라고 주장하며 격심하게 반대하였으나, 맥아더는 오히려 이런 난점이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인천상륙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1950년 8월 28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었다. 상륙작전은 동해에서 미군함 미주리호로 삼척 근처에서 상륙작전준비로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을 시작했고, 서해에서는 서해 최적의 상륙지점으로 간주된 군산시에서도 상륙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수 차례 실시하는 등의 기만작전으로 시작되었다. 1950년 9월 4일 상륙지점인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이 시작되었으며, 상륙 당일인 9월 15일까지 지속되었다. 9월 14일에는 영덕군에 장사 상륙 작전이 실시되었다. 이와 동시에 맥아더는 군산에 상륙할 것이라는 거짓정보를 흘렸으며, 이 정보에 속아 넘어간 인민군들은 군산의 방어를 강화하면서 다른 지역의 경계가 허술해졌다. 9월 15일, 작전 개시일에 함정 206척, 7만여 명을 동원하여 영종도 근처에 집결,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약 7만 5천여 명이 참가하여 8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북한군은 약 1만 명이 참가하여 5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3) 장진호전투
장진호전투는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이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규모가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벗어나기 위해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 간에 걸쳐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 목적과 병력규모를 11월 초까지도 경시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선제공격을 단행하기로 함에 따라 동부지역을 담당한 미 제10군단 알몬드(Edward M. Almond)소장은 국경선을 목표로 한 북진을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1950년 11월 1일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1군단을 우측, 미 제7사단을 중앙, 미 제1해병사단을 좌측으로 하여 국경선으로 진격하는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은 미 제10군단 정면에 제9병단을 투입하고 있었다. 제9병단은 예하에 제20군단과 제27군단, 제26군단을 두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27일 중공군이 유담리의 미 해병대를 공격하며 전투가 개시되었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장진호 지역의 전황이 급변하자 미 제10군단장은 11월 30일 하갈우리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기존의 북진계획을 재검토하였다. 회의에서 알몬드 소장은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의 작전기지로 이동한다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유담리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에 미 제1해병사단의 제5연대와 제7연대가 각각 이를 격파하고 12월 4일 하갈우리에 진입함으로써 유담리 포위망 돌파작전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장진호 동쪽에서 고립된 미 제7사단은 구출이 지연되자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하갈우리로 이동하였다. 하갈우리에 대한 공격은 중공군 제58사단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또한 중공군 제60사단은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하여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 제1해병사단의 분전으로 12월 7일 고토리로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제1해병사단은 12월 11일 함흥지역에 모두 진입함으로써 장진호전투를 마무리하였다. 이 전투에는 미해병대 약 2만 5천여 명이 참가하여 4천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중공군은 약 12만 명이 참가하여 5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참고자료
국가보훈처, 《6.25전쟁 65주년 행사 동영상 - 6.25전쟁 구국의 3대전투》, 2015. 6. 23.

집필자
이희창(한양여자대학교 행정실무과 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15. 11. 19

최종 주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