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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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여성 교류

주제유형
역사적사건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배경
1988년 서울 올림픽개최를 앞두고 노태우 정부는 남북 교대와 대중·대소관계 개선과 북한의 미일관계 개선 협조의 내용을 담은 ‘7·7선언’을 발표했다. 북한 또한 이러한 조치에 호의적이어서 남북교류의 열기는 유엔가입도 북한과 동시가입을 승인(1990) 받는 결실을 보았다. 정부는 ‘정경분리정책’을 견지하면서 민간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남북 경제협력을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동시에, 다양한 사회 문화 영역에서 남북교류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1990년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제정 이후, 남북 간 인적 교류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남북 여성간의 공통 관심사에 대해 토론회 등 공동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북 여성교류는 남북의 정치적 상황과 국제정세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사실상 중단의 국면을 맞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용
1990년대 남북여성교류는 활발하였다. 1990년 11월 25일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서울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연구 등 북한여성대표단 5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1991년 11월, 남북여성대표가 서울에 모여 서울토론회에 대한 실무 협의를 가졌다. 이어서 1991년 제1차 남북여성토론회가 도쿄에서 있었다. 이는 분단 후 첫번째 민간차원의 남북교류의 여성모임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1992년 3월에는 제2차 토론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토의 주제는 ‘가부장제 문화와 여성’ ‘통일과 여성’ ‘평화와 여성’이었다. 1992년 9월 제3차 토론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주제는 ‘민족 대단결과 여성의 역할, 일제의 조선침략과 지배, 평화창조와 여성의 역할’이었다. 제4차 토론회는 다시 도쿄에서 열렸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 전쟁책임과 전후 보상: 종군위안부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1993년 10월에는 도쿄에서 위안부 문제 아시아 연대회의를 개최했고, 1993년 11월에는 일본의 전후 처리문제에 관한 평양토론회가 개최되었다. 1994년 7월에 김일성이 사망하였다. 이후 남북교류 사업이중단되었다가 1999년 10월 8일-12일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베이징 3자회담을 가졌다.


2000년대 들어와 2002년 10월 16-17일에 ‘남북여성통일대회’가 금강산에서 열려 해외여성 20명 남측 357명, 북측 300명 등 약 700명이 참여했다. 6·15 공동선언의 실천과 평화를 위한 민족의 단합에기여하는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2003년 ‘남북여성평화행진’ 행사 개최에 합의했으나 북의 사정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2007년 10월에 열린 남북정상 회담에서 여성분과가 신설되어 최초로 여성계 대표 3인이 참석했다. 이후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사실상 남북 여성교류는 중단된 상태이다.

참고자료
김선욱 외 3인 《북한여성의 지위에 관한 연구: 여성관련법 및 정책을 중심으로》, 한국여성개발원 1992.
김원홍 외 1인 《남북여성교류현황 및 활성화 방안》,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0
김재인 외 1인 《여성비정부기구를 통한 남북한 교류협력 활성화 방안 연구》, 통일연구원, 2000.
정무장관(제2)실《남북여성교류방안에 관한 연구》, 1991.
한인영 외 1인 《남북여성교류 활성화 연구》, 여성부, 2008.

집필자
정현주(사단법인 역사·여성·미래 상임대표)

최초 주제 집필
2014. 11. 12

최종 주제 수정
2014.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