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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1950년대 통상정책

분야별 주제 및 주요내용 및 소개 테이블
주제유형 정책/제도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의의

해방 이후 한국 통상정책의 특징은 자주적 통상정책을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군정기 동안에는 한국의 자주적 통상외교정책이란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에도 통상정책은 1950년대 전반까지 황무지상태였다. 그리고 1950년부터 1953년의 6.25 전쟁기에도 통상외교정책은 보잘 것 없었다. 


다만 6.25 전쟁 발발전인 1950년 6월 2일에 「한일통상협정」이 체결되었을 뿐이다. 「한일통상협정」은 해방 후 한국이 외국과 처음으로 체결한 통상협정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한 1956년 11월 28일 양자 간의 통상협정으로 「한미 우호통상 및 항해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통상외교정책이 시도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라고 볼 수 있다. 1950년대 후반의 한국의 통상외교정책의 기본방향은 ① 통상외교활동의 강화, ② 통상 및 경제관계조약 체결, ③ 해외시장의 개척 등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통상외교정책으로 1958년 10월에는 「한국과 독일간의 기술원조협정」이 체결되었고 11월에는 「한국과 월남간의 관세협정」이 체결되었다. 또한 정부는 외국과의 경제외교활동을 강화하고 국제기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정책의 성과는 보잘 것 없었다.

근거

「한일통상협정」, 1950.6.2
「한미 우호통상 및 항해 조약」, 1956.11.28
「한국과 독일간의 기술원조협정」, 1958.10
「한국과 월남간의 관세협정」, 1958.11.5

배경

1940년대와 1950년대는 세계적으로 무역협력 분위기가 조성된 시기로서 전후 경제 부흥과 무역확대를 위한 범세계적인 협력 기구가 탄생하였다. 브레튼 우즈 협정에 의한 IMF와 IBRD(1944년) 및 아바나 헌장에 따른 GATT(1948년)의 탄생이 그것이다. 한편, 동서 냉전의 격화로 미·소를 양극으로 하는 전후 구호원조 및 개발원조가 정치적 관계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세계경제의 조류 속에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도 통상정책은 그야말로 황무지 상태였으며 다만 6.25 전쟁 발발전인 1950년 6월 2일에 「한일통상협정」이 체결되었을 뿐이다. 6.25 전쟁을 겪은 이후 한국의 경제외교는 경제부흥을 위한 대외원조 획득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주로 미국이나 UN 등 국제기구에 의존해야 했다. 


IMF와 IBRD에 가입함으로써(1955년) 한국경제를 세계경제와 연결하는 최소한의 통로를 마련하였으나, 미국 일변도의 협력관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1956년 11월 28일 양자 간의 통상협정으로 「한미 우호통상 및 항해 조약」을 체결하는데 그쳤다.

내용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군정기 동안에는 한국의 자주적 통상정책이란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에도 통상정책은 그야말로 황무지상태였다. 그리고 1950년부터 1953년의 6.25 전쟁기에도 통상정책은 보잘 것 없었다. 다만6.25 전쟁 발발전인 1950년 6월 2일에 「한일통상협정」이 체결되었을 뿐이다. 전문 4조와 한일무역계획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일통상협정」은 양국 간의 통상관계를 긴밀화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모든 무역거래는 본 협정과 동시에 체결되는 「통상에 관한 금융협정」의 조건과 규정에 의한다.
② 양국 간의 수출입은 「한일무역계획」에 표시된 금액까지 허가함을 원칙으로 한다.
③ 「한일무역계획」은 언제든지 상호 합의에 의하여 수정 또는 확장할 수 있다.
④ 양국 간의 무역거래는 당사국의 수출입통제 및 외환관리의 범위 안에서 행한다.
⑤ 양국은 제3국과의 무역을 촉진시키기 위해 다각적 무역을 발전시킬 가능성을 협의한다.


1953년 북한과의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이어 전쟁복구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면서부터 한국은 대외통상 외교활동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1956년 11월 28일 「한미우호통상 및 항해 조약」이 체결되었다. 


전문 25조와 의정서로 구성된 이 조약은 구한말에 체결된 「한미통상조약」 이래 74년 만에 다시 체결된 것으로서 양국 간의 평화 및 우호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이와 더불어 양국 국민 간의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촉진시키고 또한 상호 유익한 통상관계를 긴밀화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국민의 입국, 체제, 거주에 내국민대우와 최혜국대우를 부여한다.
② 법인의 사업 활동과 자유직업 수행에 최혜국대우를 부여한다.
③ 신체의 보호, 자산의 공개 수용, 재판권 및 과세에 내국민 및 최혜국대우를 부여한다.
④ 관세 및 해운에 최혜국대우를 부여한다.
⑤ 외환관리에 내국민대우 및 최혜국대우(단 IMF 업무규정의 범위 내에서)를 부여한다.


1950년대 후반에 한국의 통상정책은 통상외교활동의 강화, 통상 및 경제관계조약 체결, 해외시장의 개척 등에 중점을 두었다. 경제외교활동의 강화조치로서 정부는 공무원, 실업인 등을 해외에 파견하여 외국과의 친선을 도모하면서 수출상품의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수입상품의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한편 외국의 경제사절단을 초청하여 경제협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1957년 3월 상공부장관을 수반으로 하는 통상사절단이 대만을 방문한 바 있다. 1958년 10월 정부관계자가 유구(琉球, 오키나와 제도)에 파견되어 미곡수출계약이 체결되었으며 1959년 7월 유구경제사절단이 내한하여 교역확대를 협의한 바 있다. 1958년 8월 문화사절단이 필리핀을 방문했고, 1959년 5월 필리핀 무역 및 문화친선사절단이 내한하여 통상진흥문제를 토의한 바 있다.


정부는 통상외교활동을 강화하기 위하여 국제기구와의 경제협력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당시 정부는 UN 경제사회이사회 산하기구인 ECAFE(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의 정회원국으로서 이 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60년 정부는 UN 확대기술원조계획에 참여하여 상당한 규모의 원조를 받은 바 있다. 


경제협정의 체결과 관련해 1958년 11월 5일 「한국과 월남간의 관세협정」이 체결되어 대월남 수출상품의 최저관세율이 적용되었고 월남 상품에 대한 한국의 최혜국대우가 적용되었다. 이에 앞서 1958년 10월에는 「한국과 독일간의 기술원조협정」이 체결되었다.


해외시장의 개척조치로서 해외수출시장에 대한 조사와 시장개척방안이 강구되었으며 이를 위하여 수차에 걸쳐 국제무역박람회에 참가하였다. 1960년 4월과 6월에 대일 미곡 수출교섭단이 파견되었으며 그해 9월 일본 미곡 시찰단이 내한, 미곡 교역문제가 토의되었다. 1960년 2월 유구통상대표단이 내한하였고 1월 교역확대를 위한 동남아친선사절단이 파견되었다. 그해 10월 냉동 돼지고기 등의 대일 수출을 위하여 실무자가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일본의 냉동 수산물 무역시찰단이 내한하였다. 재일교포의 북송문제로 1959년 6월 15일에 중단되었던 한일간의 통상이 1960년 4월 2일에 전면적으로 재개되었다. 


연중에 정부는 미국정부에 대하여 미국의 외자통제규제(Foreign Assets Control Regulation)에 묶여있던 돼지털 등 특정상품의 대미 수출 결정교섭을 추진하였다. 외자통제규제란 6.25 전쟁을 계기로 미국 정부가 중국, 북한 등 공산국가에서 생산된 완제품 수입과 공산국가에서 생산된 원자재를 이용하여 비공산국가에서 제조하거나 가공한 제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규제조치를 의미한다.


정부는 1960년에도 해외시장의 조사, 주요 수출품목의 전시 및 선전, 외국상사와의 거래 알선 등을 통한 대외무역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국제무역박람회에 참가하여 1953년 이래 총 39회의 박람회에 참가하였다.

참고자료

신현종 《한국무역론》 박영사, 1997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감≫, 1951~1959
한국무역협회 ≪한국무역사≫, 2006

집필자

이연호(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8. 09. 07

최초 주제 수정

2008.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