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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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립유격부대

주제유형
조직/기구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근거
독립 제1유격대는 국본 일반명령(육) 제72호에 의거 1950년 9월 18일부로 창설되었다. 이후 유격대는 통상적으로 정식명칭과 함께 별칭에 해당하는 ‘명부대’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배경

6.25전쟁시 수도가 대구로 옮겨지자 많은 수의 학생들이 학도의용군으로 자원, 입대하여 전선으로 나가고 있었다. 1950년 8월 초 육군본부 정훈감실의 협조로 학도기간대가 조직되어 수 천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자원하여 학도병으로 나갔으며 이들은 독립유격부대로 들어갔다. 이러한 부대들 중 하나가 일명 ‘명부대’ 즉 독립 제1유격부대였다. 


제1유격대의 형성과 활동에 가장 관계가 깊은 인물이 이명흠이었다. 그는 육사 5기생으로서 소위로 임관하여 전방에서 소대장, 중대장을 마친 후 국방부내 정훈국이 창설될 때부터 정훈업무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전쟁발발 이전에는 서울시내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사상범과 이북에서 월남한 젊은이들을 한 곳에 모아 교화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남침 직후 그는 1950년 8월경까지 군관민의 사기앙양, 적군의 귀순공작 등 선무공작을 주로 전개하다가 유격대를 편성하였다.


내용
유격부대 형성에는 이명흠 대위 외에 당시 밀양에서 민간인 유격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국회의원 최윤동의 역할이 컸다. 최윤동은 국군이 후퇴를 거듭하자 밀양에서 양남지역의 청년들을 개인적으로 규합하여 일종의 유격부대를 운영하고 있던 중이었다. 대구역 광장에서 집합하라는 모집광고를 보고 모인 인원은 거의 천 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 중 인원을 선발하여 8월 27일 대대편성을 단행하였다. 이때 제1유격대의 전체인원은 처음부터 대구에서 모집된 560명과 밀양에서 최 의원에 의해 이미 모집되어 있던 학생과 청년 160명이 합해져 최종적으로 772명에 달하였다. 이 유격대의 대대장은 이명흠 대위였고 부대명칭을 부대장 이름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명부대로 지었다. 유격대는 편성당일부터 훈련을 개시하였다.


유격대는 훈련도중 8월 31일에 육군본부로부터 밀양에서의 훈련을 중단하고 부산으로 이동하라는 작전명령을 받고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육본에 도착한 즉시 이들은 육본 작전국장 강문봉 이름으로 발행된 육본직할 유격대원이란 대원증을 발급받고 본격적으로 유격훈련에 재돌입하였다. 그러던 중 강 국장으로부터 장사리 상륙작전 명령을 하달 받았다. 강 국장의 명령은 포항지구에 대하여 공세를 취하고 있는 적을 견제하고 전면적인 반격을 시작하기 위해서 독립 제1유격대가 장사리에 상륙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유격활동을 전개해야한 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육본 작명 제174호(1950.9.10)에 의거 출동명령이 하달되었다. 작전기간은 9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으로 명시되었다. 그리고 작전지역에 대한 상륙방법은 대형 LST를 이용하며, 유격대의 상륙전 감행직전에는 유엔 항공기에 의한 공중폭격과 군함에 의한 함포사격이 있을 예정이었다. 마침내 9월 13일 오전 유격대는 출동준비를 완료하고 곧이어 육본연병장에서 정일권 참모총장과 다수의 군 장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출정식을 거행하였다. 출정식에 참석한 인원은 총772명이었다. 


772명의 대원들은 부산항 제4부대로 이동하여 그곳에 정박한 2700톤급 LST(문산호, 대한해운공사 소속)에 승선하였다. 이들은 몇 시간의 항해 후 9월 14일 02:30경에 장상동 해안에 근접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갑자기 해안고지로부터 소총과 박격포 사격이 비 오듯 쏟아졌다. 문산호를 인도하여 장사동으로 간 영군군함 1척만이 함포지원사격을 실시하고 약속된 항공폭격이 없었다. 


이들은 해안경비초소로부터 약 200미터 지점에 상륙작전을 감행하려고 시도하였다. 지원사격도 없이 전면의 적의 초소와 좌우의 고지에서 맹렬히 쏟아지는 적의 사격망을 뚫고 상륙한다는 것은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유격대 백운봉의 회고에 의하면, 상륙 시 60여명이 전사하고 9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1차로 상륙을 완료한 대원들은 적의 토치카로 육박하여 수류탄전을 전개하였다. 선두에서 지휘하던 제28연대장 이영훈 대령이 적이 쏜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시도 끝에 마침내 장사동 해안지역의 주요 거점인 200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때가 9월 14일 14:50경으로 문산호가 장사동 해안에 도착한 지 무려 10시간의 사투 끝의 결과였다. 인원점검을 통해 이때까지 아군의 희생자 수가 무려 100여명에 이르고 있었다. 비록 적의 배후에 형성된 고립무원의 배수진이긴 하였으나 일단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상륙작전은 성공한 셈이었다. 


명부대장은 즉시 부대를 재배치히고 적의 역습에 대비하고 있던 중 적의 공격을 받았다. 전투는 3시간 이상 계속되었고 점차 유격대는 보급, 탄환 등의 부족으로 어려운 국면에 처하였다. 부대장은 전원이 현 위치를 사수하다가 옥쇄할 결심이었으나, 다행히 아군 정찰기를 목격하고 신호를 보낸 후 미군 소속 헬기 1대가 도착하였다. 명부대장은 헬기를 타고 동해안 해상에 대기하고 있던 유엔 해군 순양함에 도착하여 히킨스 해군소장에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 후 유엔 해군과 공군의 대대적인 지원사격하에 철수가 이루어졌다. 


철수작전은 19일 06:30경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철수선인 LST(조치원)은 상황의 급박함으로 인해 50여명이 미처 승선하기 전에 출발해야 했다. 적지에 남겨진 잔여병력들은 적에게 희생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조치원호가 부산항에 도착한 이후에도 이틀 동안이나 선내에서 대기하던 부대는 9월 21일 저녁에 열차편으로 구포역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역전 광장에서 주먹밥으로 대강 허기진 배를 채운 후에 근처에 있던 김해국민학교로 이동하였다. 


장사동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부산항으로 귀환한 유격대는 해체되지 않고 국본 일반명령(을) 제72호(1950.9.18)에 의거 정식으로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로 명명되었다. 김해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이명흠 부대장은 부산에 있는 육본에 가서 명부대의 법적인 문제를 논의하였고 그 결과 공식부대로서의 위치를 인정받았다. 이후 유격대는 북진하는 국군과 유엔군의 뒤를 따라 북한군 패잔병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참고자료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신오성, 1995.
육군본부 <<한국전쟁시 학도의용군>> 육군인쇄창, 1994.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제2권, 중앙일보사, 1983.
국방군사연구소 <<건군50년사>> 서울인쇄, 1998.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8. 09. 03

최종 주제 수정
2008. 0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