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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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

주제유형
역사적사건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3 광주로 통학하던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간의 충돌을 계기로 학생들이 반일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간 학생운동 사건이다


11 3일의 다소 우발적인 시위가 11 12일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의 대규모 가두투쟁으로 연결되고, 이어 점차 인접지역인 목포와 나주로 확산되기 시작하여 12월에는 서울에서의 학생시위로 연결되는 등 전국의 149개교 학생이 참가한 일제시대 대표적인 반일학생운동이다.


광주에서의 민족간 학생 충돌이 전국적인 대규모 반일투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선 1926년 11월 3 성진회라는 학생비밀결사조직이 광주에서 결성되어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1920년 초반 이후 학생들은 동맹휴학투쟁을 통해 ‘친일 교원 배척’, ‘노예교육의 철폐’, ‘조선역사의 교수’, ‘교내 조선어 사용’, ‘학생회의 자치’ 등을 주장하면서 배일의식을 함양하고 있었다. 이에 사회주의 청년 학생 조직운동이 발달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적 연계망이 구축되고 있어 지도력 있는 운동의 전개가 가능하였다.


운동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11 3일 역전에서의 충돌을 계기로 학생들은 광주일보사를 습격하고 광주역전에서 일본인 학생들을 타격한 후, 300명이 대오를 형성하여 광주시가지를 돌며 구호와 운동가를 부르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에 일제는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한국학생 75명을 구속했다. 일제의 조치에 분노한 학생들은 11 12일 제2차로 다시 봉기하여 광주형무소를 포위하고 '구속자석방' '조선독립'을 외치면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고 그 결과 다시 약 400명의 학생이 경찰에 구속당했다.


그리고 시위는 서울로 확산되어 12 2일 밤 서울시내의 경성제대, 1고보, 보성고보, 중앙고보, 중동학교 등에 수천 장의 격문이 살포되었고, 이를 계기로 5일부터 13일까지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특히 9일에는 서울의 모든 중등학생들이 격렬한 시위에 나섰고, 이날 하루에만 1,200여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격문의 내용 및 시위 구호는 ‘검거자 석방’,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식민지노예교육제도 철폐’, ‘민족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획득’, ‘전국학생대표회의 개최’ 등 이었다.


반일 시위운동이 점차 확산되자 일제는 조기방학을 실시하고 경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1 15 9 기해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하기로 계획하여,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 ‘약소민족해방만세’,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며 시위 운동을 벌여,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를 전개했다. 그리고 학생들의 시위는 일단 1930 3 3 1운동 기념일을 전후한 시위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광주학생운동은 1929 11월 부터 1930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참가한 학교는 194개교, 참가한 학생수는 약 5 4,000명에 달했다. 그리고 항일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 학생은 582, 무기정학은 2,330, 피검거자는 1,642명에 이르렀다.


항일광주학생운동은 조선의 독립, 식민지교육의 반대,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획득 등을 목표로 전개된 민족운동이나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가장 절실하고 구체적으로 느끼며 싸워 얻고자 한 것은 차별없는 교육, 민족주의 교육의 실현이었다는 점에서 일제시대 대표적인 교육운동이었다.


참고자료

김성보, <광주학생운동과 사회주의 청년·학생조직>《역사비평》 1989년 봄호(통권 6), 1989

이준식,<광주학생운동의 전개과정과 역사적 성격>,《한국근현대청년운동사》풀빛, 1995


집필자
강명숙(배재대 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7.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