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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20개사단 확장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1952년 미 합참은 양유찬 주미대사가 6월 18일 제의한 「한국공군 3개년 양성계획」과 클라크 대장이 6월 23일 건의한 「국군 2개 사단 증강계획」을 재검토한 후 공군을 종전수준으로 유지하고, 육군과 해병대, 카투사를 종합하여 463,000명으로 책정하여 국방부에 제출했다.

배경

국군의 증강안은 1952년에 본격적으로 거론되어 1954년 완전히 실현되었다. 한국정부는 1952년 초 휴전과 유엔군의 철군이 예상되자 휴전 후의 국방을 고려하여 국군의 증강을 신중히 검토했다. 그 결과 한국 정부는 육군의 규모를 10개 사단에서 20개 사단으로 하는 증편계획을 수립하여 미국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한국 유엔대표단도 미국이 한국군 10개 사단을 추가로 무장시키고 미군이 지휘하도록 하는 요청안을 제출했다.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국군증강을 지지하게 되고, 1952년 5월 유엔군사령관으로 새로 부임한 클라크대장이 이를 적극 추진함에 따라 증강계획은 실현단계로 접어들었다.

내용

한국정부는 국군 증강안을 다각도로 검토하면서 미국 정부와 협의를 도모하고 있었다. 7월 17일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대장의 방한(訪韓)을 계기로 극동군이 한국 육군 증강안을 요청하자, 미 합참도 다시 육군 2개 사단 증강계획을 검토하게 되었다.


미 합참의 국군 증강안은 최종적인 심의를 거쳐 10월 30일 미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1952년 10월말 한 ·미 양국 정부는 한국 육군의 병력수준을 250,000 명에서 463,000 명으로 상향 조정하기로 합의하고, 동년 11월말부터 국군 사단을 증편하기 시작했다.


미 제8군은 1952년 4월 28일 3개의 경장비 교육 보충연대(제37.제38.제39연대)를 창설하였고 6월 13일 3개 연대(제50.제51.제52연대)를 창설하였다. 그러던 중 1952년 10월 30일 국군 2개 사단 증편안이 확정되자, 육군본부는 11월 8일 6개 경보병연대를 중장비연대로 개편하고, 제12.제15사단사령부와 6개 경보병연대(제53~제59연대)를 다시 편성했다. 


한편 유엔군사령관 클라크대장은 1952년 11월 1일에 장기계획의 일환으로 국군 지상군의 20개 사단 확장계획을 미 합참에 건의했다. 즉, “한국 육군을 1953년 8월까지 20개 사단으로 확장한다. 2개 군단을 6개 군단으로 증가하여 추가 창설사단을 지휘하게 한다. 한국군 2개 사단의 편성이 완료될 때마다 유엔군 1개 사단이 예비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며, 1953년 5월까지는 유엔군 사단들이 그 임무를 한국군 사단에 인계할 것이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1954년 중반까지 미군 4개 사단과 2개 군단사령부의 재배치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육군 20개 사단 증편안은 1953년 1월에 집권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새로운 정부의 새로운 대한정책, 즉 한국전쟁의 조기종결, 한국군의 증강과 미군의 투입감축에 의거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2월과 4월에 각각 2개 사단 등 4개 사단의 창설이 결정되고,5월에는 증편계획으로 확정됨에 따라 제20.제21.제22.제25.제26.제27보병사단이 추가로 창설되고, 제3군단사령부도 재창설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휴전 당시 국군은 3개 군단 18개 사단을 유지하였으며 1954년 5월까지 5개 군단 20개 사단으로 증편되었다. 국군 20개 사단은 클라크 장군이 제시한 증편안이 휴전 후 9개월 만에 완성을 보게 된 결과였다.

참고자료

국방부 <<국방사>>제2집 국방부, 1987.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신오성, 1995.
국방군사연구소 <<건군50년사>> 서울인쇄, 1998.
남정옥 <<한미군사관계사>> 군사편찬연구소, 2002.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