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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휴전협정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휴전협정에 한국대표가 빠진 것은이승만 대통령의 뜻이었다. 이 대통령은 국군 대표가 휴전협정 조인 참석 문제에 대해 육군 참모총장 백선엽 대장과 얘기를 나누다 “총장은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라고 말했다.

배경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측이 휴전당사자로 서명하기를 회피한 것은 휴전 이후에 대해 유엔, 즉 미국이 책임을 지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1953년 6월에 들어서면서 휴전회담의 진척이 가시화 되자 휴전 반대 궐기대회가 폭염만큼이나 열기를 더해 갔다. 그 때문에 미국이 곤혹스러워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회담의 진전이 멈추어지지는 않았다.

내용

1953년 6월 7일 한국정부는 전국적으로 준 비상계엄령을 하달했고, 미국 방문 중에 있던 육군 참모총장 백선엽 대장 이하 전 장병에게 긴급 귀국명령을 내렸으며, 유엔군측 휴전 대표단에서 한국 대표를 소환했다. 


이는 유엔측이 1953년 5월 25일 기존의 입장이던 송환 거부 포로의 석방을 철회한 후, 6월 8일 공산측이 주장하는 포로교환 협정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한국군 대표의 휴전회담 참석을 거부하는 동시에 정전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태도를 성명을 통해 발표했다. 그 결과 한국군 수석대표 최덕신 육군소장도 포로교환문제에 있어서 유엔군측의 제안이 종전의 내용과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철회하지 않는 한 휴전회담에 참석하지 않을 것을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에게 통고했다.


그 뒤 한국군 대표단은 1953년 6월 1일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최덕신 소장을 수석으로 하고, 이호 육군준장, 김일병 해군준장, 김창규 공군준장을 각 군 대표로 보강하여 유엔군기지에 복귀했으나 연락장교외에는 정전협상에 참석하지 않았고,정전협정 체결 시 유엔군사령관이 서명할 때만 최덕신 육군소장이 16개국 참전대표와 배석했을 뿐이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제159차 본회의장인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의 동측 출입구로 유엔군측 수석대표 해리슨 미 육군중장 일행이 입장했고, 이와 동시에 공산측 수석대표 남일 북한군 대장 일행이 서측 입구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국어·영어·중국어로 된 전문 5조 63항의 협정문서 9통과 부본 9통에 쌍방 수석대표가 각각 서명하고 각방 선임장교가 상대방에게 건네주었다. 쌍방 대표들은 서로 악수도 인사도 없었고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로 사무적인 서명만 했다. 10시 12분 서명을 마친 양측 수석대표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입을 열지 않은 채 퇴장했다. 해리슨 중장은 2~3분간 기자들과 대화를 나눈 후 유엔기지 문산으로 떠났고, 남일도 소련제 지프차를 타고 현장을 떠났다.


이로부터 3시간 후인 13:00 시 유엔기지내 문산극장에서는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이 그의 보좌관들과 브리스코 미 극동해군사령관, 앤더슨 제5공군사령관, 웨이랜드 극동공군사령관, 테일러 미 8군사령관, 최덕신 한국군 대표, 그리고 16개국 참전 대표들이 임석한 가운데 정전협정 확인 서명을 마쳤다.


한편 공산측은 김일성이 이날 오후 10시에 평양에서 서명했고, 중공군의 팽덕회는 다음날인 7월 28일 오전 9시 30분에 개성에서 서명함으로써 정전조인 절차는 모두 끝났다. 이로써 3년 1개월 2일, 즉 1,129일 동안 지속된 6.25전쟁은 정전상태로 들어갔다.

참고자료

송효순 <<대석방>> 신현실사, 1973.
한표욱 <<한미외교요람기>> 중앙일보사, 1984.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휴전사>> 서라벌, 1989.
양대현 <<휴전회담 비사>> 형성출판사, 1993.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7.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