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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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후퇴

주제유형
역사적사건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배경

한·만 국경으로 진출하였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를 하자, 북한주민들은 많은 사람들이 다시 공산주의 독재 치하에서의 삶을 거부하고 자유를 찾아 월남을 결정하였다. 따라서 피난민 대열이 남으로 뚫린 도로를 가득 메우게 되었고 또 일부는 군이 사용 중인 항만지역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피난민의 이동은 국군과 유엔군이 다급하게 철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많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었다.


유엔군은 최초 병력과 군수물자의 후송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군사작전에 지장을 줄 정도의 피난민의 발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난민의 수효가 증가하자 이들의 안전한 후송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혹한과 질병,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리며 육로와 해상으로 북한을 탈출하게 되었다.


내용

북한지역에서 남한까지의 먼 거리와 영하 30도의 강추위는 이들 북한 피난민들에게는 거의 절망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이들 피난민들이 어떤 적절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못한다면 38도선에 이르기 전에 공산군의 진격이 그들의 대열을 앞지르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를 시작하게 되자 함경도 지방의 많은 주민들도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피난민과 철수병력들이 혼재된 상황으로 인해 성진, 함흥, 흥남, 원산 등의 항구들은 큰 혼잡을 빚었다.


당시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피난민 문제를 검토한 결과 최초 군인, 경찰, 공무원 등의 가족들 2만 5천명을 피난시킬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연일 밀려드는 피난민을 보다 못해 다시 검토하여 5만 명으로 늘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부족하여 수송수단이 허용하는 대로 가능한 많은 피난민을 후송한다는 원칙 아래 피난민이 이용할 수 있는 군용선과 목선을 총동원하도록 조치하였다. 피난민들의 선편 후송이 시작되면서 흥남부두를 비롯한 시내 중심가는 배를 타려는 피난민들로 일대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국군이 미 공군기편으로 비행장을 떠날 때마다 비행장에 많은 피난민들이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는 “어린 자식만이라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부모들의 눈물겨운 모습도 있었다. 흥남지역 철수작전이 완료된 12월 24일 이후에도 흥남부두에는 배를 타려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마지막 수송선이 부두를 떠날 때 육지에 남은 피난민들은 울부짖으며 가는 배를 향해 몸부림쳤고, 일부는 바다에 몸을 던지기도 하였다. 이 기간 중에 군이 후송한 피난민은 10만 명을 상회하였고 이때 거의 같은 수의 피난민이 선박 부족으로 그대로 뒤에 남겨졌다.


이와 같이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의 1.4후퇴 시 자유를 찾아 남하한 피난민은 멀리는 산간 오지인 함경북도 혜산진에서부터 가깝게는 강화도 북쪽의 연백에 이르기까지 북한 전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이때가 피난민 발생의 절정기로써 총수는 100만 명을 상회하였다. 후일 이때의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제목의 대중가요가 한(限)을 달래면서 한 세대를 풍미하였으며, 오늘도 그날을 되돌아보게 한다.


참고자료

국방부 <<한국전쟁사>>제6권 국방부, 1974.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장진호전투>> 국방부, 1981.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 중앙일보, 1985.
양영조 외 <<6.25전쟁사>>제3권 신오성, 2005.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7. 12. 01